한국일보

[여성의창] 비탈길

2022-12-29 (목) 데보라 임(재정설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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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동네에는 꼬마들이 가장 사랑하는 비탈길이 있었다. 그 언덕길은 눈이 오면 썰매를 타기 위한 꼬마들의 총출동으로 장사진을 이루는 곳이다. 선생님의 호루라기 없이도 줄을 잘 서고 한 사람씩 신나게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그 언덕은 지금의 스키장과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의 장소였지만, 워낙 겁이 많은 나에게는 아무리 오빠 등 뒤에 바싹 붙어 썰매에 몸을 맡겨보아도 눈부터 감아버리게 하는 곳이었다. 또한 그 언덕은 장터에 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야 하는 관문이기에 연탄재를 가져와 연신 퍼붓는 어른들과 겨울놀이를 즐겨야 하는 꼬마들 간에 경쟁이 불티나는 곳이었다. 그 후 자라오며 나는 그렇게 경사진 골목을 이제껏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사는 이 지역에서 산마테오 브리지를 건너가며 그 시절의 언덕을 떠올리게 되었다. 다리가 시작되면서 큰 배가 지나가는 높이만큼 다리는 한동안 경사를 가지며 올라가는데, 경사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마치 한국의 청계천 고가다리의 스릴을 방불케 한다. 나만 이런 느낌일까. 멀리서 보는 장엄함과는 다르게 다리 위를 달리다 보면 비탈경사를 거의 느끼지 못하면서 어느새 바닥으로 내려앉게 된다. 이 다리를 건너 다니면서 나는 나자신의 젊음, 건강, 인생의 경사를 한번씩 생각해보곤 한다. 이미 내 인생도 가장 높은 정점을 지나 비탈길로 내려오는 중임에도 나는 여전히 젊다 생각하고 내 몸의 건강 기준을 나이에 맞추지 못하는 착오를 어찌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경사의 가장 최고봉은 죽음의 문턱이다. 며칠 전에 드디어 사랑하는 마술사! 내 엄마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가파른 숨소리와 현저히 떨어져 내리는 맥박숫자를 보며 나는 그 누구도 붙잡을 수 없는 인생의 급경사를 보게 되었다. 100이 넘던 숫자가 순식간에 제로가 되는 순간, 그렇게 울며불며 엄마를 흔들어 깨워도 나는 결국 가장 가까웠던 엄마를 힘없이 보내 드려야 했다.


맥박의 급경사를 통해 엄마는 나에게 가장 큰 마술을 또 한 번 보여주셨다. 인생은 바로 이렇게 끝이 나는 거라고. 아직도 내 눈에 선한 엄마의 임종과 따뜻함을 내 품에 느끼며 나의 비탈길을 생각해 본다. 가장 높았던 내 인생의 정점을 찍고 이미 비탈길에 들어선 나임에 틀림없는데 여전히 꼭대기라 생각하며 준비되지 않은 비탈길을 조금의 숙임도 없이 내려오고 있는 위태하기 짝이 없는 나의 모습을 내려놓고, 아직도 많이 엄마와의 이별이 슬프기만 해서 주저앉고 싶은 내 영혼이지만, 지금이라도 내 비탈길을 이미 다 내려오기 전에 내가 어디까지 다다랐는지 느끼려 애쓰며 헛되게 시간을 내어버리지 않기를 다짐해본다.

“엄마,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주셔서 고마워요! 천국에 계셔도 여전히 나를 위한 마술을 기대합니다.”
“사랑해요 엄마!”

<데보라 임(재정설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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