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가깝고도 먼 사이

2022-12-19 (월) 양주옥(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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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자동차 등록 스티커가 도착해서 남편과 대화가 시작되었다. “인터넷으로 돈을 냈더니 등록스티커가 벌써 왔네. 당신 차는 1월이 등록이라 새 스티커를 제일 먼저 붙이게 됐어. 내 차는 11월이라 연말이 되는 셈이고..” “그래요? 그런데 난 자꾸 잊어버려. 내 차에 스티커 붙이는 달이 언젠지 왜 말을 해줘도 기억을 못하지?” 그랬더니 남편이 하는 말. “신경을 안 쓰니까 그렇지. 이제까지 당신이 차에 스티커 한 번 붙여 본 적 있어?” 그 말에 나는 폭소를 터뜨렸다. 정말 그랬다. 미국에 이십 오 년 가까이 살았으면서 단 한 번도 내 손으로 자동차에 스티커를 붙여 본 적이 없다. 늘 남편이 해 줬으니까.

반면 가끔 약속이 있어서 내가 나가는 날이나 식사를 챙길 수 없는 날은 미리 준비하든지 아니면 남편에게 알려준다. “국은 어디 있고 반찬은 어디 있으니 꺼내 잡숴요.” 그리고 집에 돌아와 보면 그대로 있다. 물어보면 그냥 라면 먹었단다. 주방에 관한 일은 아무리 얘기해줘도 잘 모른다. 그런데 공구나 서류, 집안의 소소한 것들은 20년 전의 것도 어디 있는지 다 안다. 오죽하면 출가한 아이들도 필요한 게 있으면 사지 말고 아빠한테 먼저 물어보고 사야 된다고 할까.

이젠 각자 산 세월보다 함께 산 세월이 더 길다. 남편이 은퇴하고 고관절 수술을 한 이후로는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식사도 함께, 산책도 함께, 병원도 함께 간다. 때로 수업에 필요한 자료가 있을 때 말만하면 준비해 준다. 어떤 것은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 만큼 가까운 사이지만, 서로 다른 것도 있다. 나는 공부에 흥미가 있지만, 남편은 손으로 만드는 것이나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요즘 기말고사와 마지막 과제로 분주한 동안 남편은 독학으로 섹소폰 공부를 시작했다. 몸이 불편하니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스스로를 위축되게 만드는 모양이다. 그래도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나름 활력소가 되는 것 같다. 워낙 음악적 재능이 남다른 남편은 삑삑 거리던 소리를 단 몇 일만에 멋진 소리로 만들어낸다. 나이 들어서 부는 악기를 배우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도 그렇게 만들어 내는 찬양 소리가 들리면 공부하는 내게도 힐링이 된다.

세월이 흐를수록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말이 필요 없는 사이. 하지만 때로는 절대 닮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이. 금성과 수성같이 생각이 전혀 다른 사이. 있을 땐 모르다가 없으면 아쉽고 그리운 사이. 어느 새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영원한 반쪽이 된 사이. 그렇게 가깝고도 먼 사이. 오늘도 그 남편이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

<양주옥(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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