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명딸이란 이름으로 자라왔다. 오라버니 넷에 막내딸로 태어났고, 게다가 아버지 형제분들 가족에도 딸이 없어 나는 집안 전체의 고명딸인 셈이다.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셨지만 피난 시절 아들 하나를 잃은 아버지께서는 둘째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또 아들이야?”를 반복하셨는데 막내로 나를 얻은 후 그렇게 기뻐하셨다고 들었다.
기억할 수 없는 어린 시절에는 미스코리아 출전을 위해 아예 자격이 안되는 나를 다리가 휘어지지 않도록 어부바는 절대 금물에, 두 다리를 바비인형처럼 똑바로 펴서 안고 다니셨단다. 수도꼭지인 나를 골려 먹는 게 최고의 재미였던 오빠들은 정말 짓궂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종아리에 거머리가 붙었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확인할 틈도 없이 강가를 50미터 이상 울며 불며 뛰었던 기억은 지금도 눈시울을 붉게 한다.
띠동갑 큰오빠는 전기 발명가여서 철저히 분해된 고물 라디오도 어느새 멋진 노래가 흘러나오게 하며, 대문의 인터폰, 무선전화기 등 우리집을 앞서게 해 준 공로자였다. 특히 큰오빠 셰프가 돼지고기로 만들어준 윤기가 자르르 흐르며 달달한 볶음밥은 아직도 나에겐 최고의 볶음밥이다.
한때 우리집에 대학생이 4명이었다. 둘째오빠는 제대 후 복학해서 4학년, 셋째오빠는 제대로 4학년, 넷째오빠는 재수해서 1학년, 나는 제대로 1학년으로 등록금을 내야 할 때마다 엄마는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가장 빠른 사슴 발이셨다.
최고로 자상한 둘째오빠는 추워서 손이 얼어도 내 스케이트 끈을 꽁꽁 묶어 주었고 벙어리 장갑 손에는 맛있는 핫도그를 쥐어 주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영어도 처음 가르쳐 주었고, 고등학교 때는 내 친구들과 나에게 멋진 과외선생님이 되어 주었다. 졸업식 날에는 가장 유명하다는 다방에 처음으로 데려다주었고, 대학에 입학하니 진 자켓과 바지도 직접 디자인 해주었다. 헤어 드라이어로 멋지게 머리를 말리며 대학 보컬그룹 기타리스트였던 둘째오빠는 가장 튀는 세련남이었다. 셋째오빠는 심장 떨리는 입학 발표에 제일 먼저 나를 번쩍 안아주었고, 둘째오빠가 디자인 해 준 옷에 맞추어 굽 있는 예쁜 구두를 골라 주었다.
서울대에 다니는 연년생 넷째오빠는 골목에서 딱지치기, 땅따먹기, 자치기 게임에 나를 늘 끼워 주었고 자라면서 공부 파트너가 되어 주었다. 대학이 각각 다르니 해마다 즐거운 축제를 즐길 수 있었지만 사실 내가 오빠들의 파트너라는 것은 썩 즐겁지만은 않았다.
생각해보면, 오라버니들은 언제나 나에게 둘러진 울타리였고 끔찍한 동생사랑 분들이었다. 특히 엄마 없는 오빠들과의 외출은 지금의 경호원들을 방불케 하는 빈틈없는 경계였다. 나에게 가장 따뜻한 추억으로 오라버니들과 꼭 다시 하고 싶은 자리는 역시나 연탄불 파티이다. 연탄불 위에 조개가 입을 쩍 벌리는 모습을 보며 신기해 하던 나에게 익은 조개를 호호 불어 번갈아 입 속에 넣어주며 옹기종기 모여 손을 쬐던 오라버니들이 많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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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보라 임(재정설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