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새로운 길모퉁이/익숙함에 진심을 속이지 말자/하나 둘 추억이 떠오르면/많이 많이 그리워할 거야/고마웠어요 그래도 이제는/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최근 들어 한국에서 역주행하고 있는 가수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가사의 일부다. 노래 제목인 사건의 지평선은 특정 사건이 관측자에게 영향을 주거나 관측될 수 없는 경계면을 일컫는 말이다.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경계면 말이다. 블랙홀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그 경계 밖으로는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사건의 지평선 바깥에 있는 관측자에겐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윤하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소멸로 향하는 블랙홀의 경계면을 끄집어 내면서 이별 뒤 세계에 빗대었다. 블랙홀에서 관찰할 수 있는 외부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에 대한 아픔과 아쉬움을 느끼는 현실의 공간이라면 블랙홀 안쪽은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이별 후 앞날을 알 수 없는 자신의 미래 삶이 자리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이별 뒤의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윤하가 말하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다.
4인조 밴드의 깔끔한 연주에 영어 가사가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그야말로 ‘순 한국어’로 쓰여진 아름다운 가사에 윤하의 뛰어난 가창력이 더해지면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윤하에게 이별의 아픔이 있는 현실이 있듯이 우리의 일상 삶에도 아픈 현실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2022년이다.
그 중에서 우리 일상의 삶을 팍팍하게 만든 현실은 인플레이션이다. 13일 연방노동부가 발표한 11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1년 전보다 7.1% 상승했다. 미국 물가는 올해 1월 7.5%의 상승률을 시작으로 지난 6월에는 9.1%로 40여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 후 7월 8.5%, 8월 8.3%, 9월 8.2%, 10월 7.7%로 하락세를 보였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인 데다 연방준비제도(연준)의 물가 인상 기준선인 2%와도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물가도 물가이지만 기준금리도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시장 일각에서 연준이 연 6%까지 기준금리를 올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는 닷컴 버블 당시인 2000년 초반 이후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인플레이션으로 생활 물가가 고공행진을 하면서 가처분 소득이 줄어든 월급쟁이들은 직장 이외에 부업에 나서는 소위 ‘투잡 인생’으로 내몰리고 있다. 지난달 기준으로 비농업 부문의 일자리가 전달 대비 26만3,000개가 증가한 반면 부업을 시작한 직장인의 수 역시 16만5,000명이나 늘었다. 부업에 나선 직장인의 수는 지난 6월 이후 최고치일 뿐 아니라 지난 6개월 평균치인 월 6만 명을 크게 상회하는 수치다.
경기 침체 우려로 기업들의 구조 조정에 따른 사무직 직장인들의 해고 공포도 우리의 현실을 암울하게 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배달 서비스업체 도어대시는 비용 절감 차원에서 1,250명의 직원을 해고했고, 이보다 앞서 메타는 전체 직원의 13%에 달하는 1만1,000명의 직원에 대한 정리 해고안을 발표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도 역대 최대 규모인 1만 명의 직원 감원에 나섰다. 트위터는 일론 머스크가 인수한 직후 3,700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금융권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티그룹이 최소 50명을 해고했고, 바클레이스는 약 200명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다.
미국의 고질적인 문제인 총격 사건은 올해도 그대로 유지됐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올들어 미국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은 600건을 넘어섰다. 범인을 제외하고 4명 이상 부상하거나 사망하는 대규모 총격 사건은 올해 들어 하루 평균 1번 이상 발생했다. 총기 난사로 인한 올해 누적 사망자 수는 621명, 부상자 수는 2,524명에 달한다.
연방제인 미국이 사회적 이슈마다 진보와 보수라는 극단적 이념으로 양극화되는 것은 더 뼈아픈 현실이다. 낙태권이나 총기 규제, 그리고 학자금 탕감 문제를 놓고도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적 이념에 의해 대립하며 나뉘었다. 다양성 속에서 단일한 목소리를 내던 미국은 이제 2개의 극단적 목소리가 대립하는 구도로 바뀌었다. 극한의 대립 속엔 혐오와 배제의 감정만 있을 뿐 공감과 받아들임의 여백은 없게 마련이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현실이다.
이제 아픈 현실의 시간인 2022년을 보내고 미지의 시간인 2023년 새해를 맞이 해야 하는 순간에 우리는 서있다. 윤하의 노랫말 대로라면 ‘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모퉁이’인 셈이다. 아픈 오늘 현실인 2022년이 새로운 길모퉁이를 돌아 2023년 반전의 해가 되기를 바라면서 희망이라는 끈을 놓지 않는다. 2022년을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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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욱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