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적응할 시간

2022-12-09 (금) 안세라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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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년만에 한국에 와서 내가 가장 먹고 싶었던 친정엄마의 요리는 ‘냉면’이였다. 엄마는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고 오이를 면보다도 더 많이 넣어먹는 것을 좋아하는 내 취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그런 냉면을 먹을 생각에 한국 도착 전부터 설렜던 나였는데, 막상 한국에 도착하니 배앓이가 시작되었다. 몇일째 설사가 이어지고, 어떤 음식을 먹어도 속이 답답했다. 엄마가 끓여주는 하얀 흰죽만이 속이 편해지는 유일한 음식이였다. 한국까지 와서 흰죽으로 삼시세끼를 먹고 있는 모습이라니!

며칠 고생을 한끝에 동네 병원을 찾아간 나는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나의 증상이 흔히들 ‘물갈이’라고도 하는 것인데 평소에 먹어왔던 음식이 아닌 새로운 음식이 배에 들어와서 배가 놀라서 그 놀란 배를 진정시켜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처방된 약을 먹고, 설사는 멈추고 조금은 나아지는 것도 같았지만 속이 더부룩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식욕이 많은 나는 한국에 오기 전부터 유튜브나 블로그를 통해 많은 맛집을 검색하며 매일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닐 거라 다짐을 했건만, 막상 내 몸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나 보다. 친정엄마는 속상한 마음에 냉면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일매일 장을 보고 내가 좋아하는(?) 아니 좋아했었던 음식을 하나씩 만들어 주셨지만 한번 뒤틀린 배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약 두달여간의 한국생활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찾은 음식은 코스트코의 머쉬룸 크림 스프. 흰죽에 질리기도 했고 쇼핑을 하는 내내 내 코를 스치는 깊은 크림 스프 냄새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머쉬룸 크림 스프는 배가 아파 누워 있는 내내 먹고 싶었던 그리웠던 음식이었다. 미국에서 항상 이맘때쯤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면 늘 만들어 먹던 스프다. 엄마가 집에서 크림 스프를 만들어 주신다고 했지만, 내가 먹던, 먹어왔던 그 스프의 맛은 절대 아닐 거라는 확신에 괜찮다고 말했었다. 코스트코의 스프를 먹는 순간, 뭔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흰죽만큼이나 속이 편하고,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은 느낌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스프를 먹은 다음부터는 속이 더부룩하지도 않고, 설사도 멈췄다. 그때부터는 내가 먹고 싶었던 한국 음식들을 조금씩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 와서 단순히 시차에 적응하기에도 시간이 걸리듯, 내 몸도 마음도 여기가 미국인지 한국인지 적응할 시간이 꽤나 필요했나 보다. 한국 도착 2주가 지나서야, 드디어 먹방 시작이다!

<안세라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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