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없는 플로리다에는 단풍드는 나무도 없다. 가을이 왔다가는 것은 조금 높아지는 하늘과 낮아지는 습도, 그리고 싸늘한 기운을 담은 바람으로 안다. 플로리다 밖에서는 가을이 왔다고 울긋불긋 화려한 단풍 담긴 사진들을 마구 보내온다.
지난여름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딸아이의 집에 몇 달 머물렀다. 부엌 벽에 커다란 달력이 걸려있는데, 그곳에 딸아이는 그달에 있을 행사나 약속 등을 기록해놓았다. 들여다보다 거의 매주에 한번 ‘데이트’라고 적힌 날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데이트’라면 결혼 전 남녀가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이라 알고 있는 내게 그 단어는 낯설게 다가왔다. 결혼한 부부끼리도 ‘데이트’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놓는 요즘 세대가 살짝 부러워졌다.
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나중에 나중에 하며 언제일지 모를 미래에 오늘의 즐거움을 저축했던 우리였다.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미루어두었던 나만을 위한 시간은 오늘이 어제가 되고 내일이 오늘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언제나 내일이라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미래의 그 어디쯤에서 가슴 설레는 그림으로만 존재하며 현재의 나를 위로했다. 그런 우리의 삶은 마치 철따라 즐길 줄 모르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서있는 플로리다의 나무와 같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서라도 조깅하는 딸아이를 보며 젊은 아이들의 사는 방식이 단풍 같은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걸레질하는 손에도 곱게 매니큐어를 바르고, 예쁜 드레스 차려입고 남편과 멋진 식당에 가서 데이트하는 여유를 누린다. 우리에게 주어졌던 것과 똑같은 분량의 하루인데 아이들이 사용하는 하루는 더 풍요롭게 보인다. 자식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면서도, 자기 삶을 송두리째 갈아 넣지 않는다. 틈틈이 자기 자신을 위해 돈과 시간을 할애한다.
사위는 퇴근하자마자 두 살 배기 아들과 놀아주느라 바쁘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아이들 잠들기 전에 목욕시켜 재우는 것도 사위의 몫이다. 같이 직장에 나가 일한 것도 아닌데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딸아이는 소파에 앉아 쉬고 있다. 사위와 딸은 아무렇지 않은데 공연히 내가 좌불안석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 그랬으면 소박맞을 일이요, 우리 세대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이들 앞에서는 아무 소리 못하고 집에 돌아와 친구들에게 이야기하자 아들 가진 친구가 퉁명한 소리로 대꾸한다.
“사위가 그러는 것은 예쁘기나 하지, 난 아들 녀석이 그러는 꼴을 봤잖아! 돈 버느라 종일 고생하고 와서는 집에서 놀고 있는 여편네 저녁 해준다고 부엌에 들어가는데 속에서 뜨거운 것이 불쑥 올라오더라.” 그래도 못된 시어머니 소리는 듣기 싫어 아들만 몰래 따로 불러서 물었단다. 집안일을 남녀 공평하게 나누어서 한다고 하는데 이건 불공평한 거라고, 같이 해야지 왜 너만 하냐고. 그랬더니 아들이 자기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아내가 자기가 한 음식을 맛있게 먹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했단다.
우리 세대의 남자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문화에서 길러졌다. 우리 부모님들은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금하셨다. 그래서 우리 때는 둘이 똑같이 일하고 와서도 아내는 앉을 겨를도 없이 저녁을 준비하느라 동동거려도 남편은 태연히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펼쳐들었다.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아이들도 건사하다 벅차면 좀 도와달라고 소리치기는 했어도, 부당하다고 분연히 일어나 여권신장을 외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남녀평등이 가정에서도 공평하게 실천되고 있는 현실이 반갑기는 하면서도 부엌일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껄끄럽다. 그렇다고 속에서 울컥하는 것을 입 밖으로 털어내지는 못하고 그저 마음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푸념으로 꺼내놓는다. 한바탕 웃으며 흉 아닌 흉을 보고나면, 애들은 저희끼리 잘 살고 있으니 이제는 우리 삶을 살자는데 의견이 모인다. 플로리다에서는 볼 수 없는 화려한 가을풍경이 담긴 사진을 앞에 놓고 더 늦기 전에 우리의 삶에 철따라 고운 물을 들일 단풍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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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옥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