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위가 꽃이고 숲이더라…바라만 봐도 좋은 산 굳이 오른 이유

2022-11-18 (금) 영암=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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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박자박 소웁탐방 - 영암 월출산 천황봉 - 천황사

드넓은 벌판에 홀로 우뚝 선 영암 월출산은 어디서 봐도 수려하다. 목포에서 순천으로 이동하든, 나주에서 강진으로 달리든 동서남북 어디서나 모습을 달리하며 웅장한 자태를 자랑한다.‘그냥 바라만 봐도 좋은데 힘들게 왜 올라가?’ 영암을 지나칠 때면 속으로 늘 이렇게 위안을 삼곤 했다. 솔직히 한 번 올라보고 싶지만, 가파른 바위 능선을 보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난 10일 미뤘던 숙제를 하듯 월출산에 올랐다. 그렇게 절경이라는 구름다리까지는 가봐야지 했다가, 정상까지 발을 디뎠다. 힘든 만큼 멋진 풍광으로 보상받은 산행이었다.

월출산은 전체 면적이 56.22㎢로 국립공원으로는 가장 작다. 정상인 천황봉(809m)까지 가는 탐방로는 5개, 천황사에서 정상을 거쳐 도갑사까지 가는 동서 종주 코스(9.5㎞)를 제외하면, 대개 왕복 6~7㎞로 짧은 편이다. 일반적인 산행이라면 2시간 안팎 거리지만, 월출산국립공원 홈페이지에 제시된 시간은 4시간이다. 충분히 휴식하며 여유롭게 걸으면 5시간 넘게 걸린다.

등반객이 가장 많이 찾는 코스는 천황사에서 산 중턱의 구름다리까지 왕복하는 길이다. 3㎞로 2시간을 잡는다. 초입의 천황사까지는 대체로 순탄하다. 월출산 조각공원과 천황야영장 주변에 물든 늦가을 단풍에 발걸음이 가볍다.


야영장을 지나면 윤선도 시비와 가수 하춘화의 ‘영암아리랑’ 노래비가 나란히 서 있다. 시비에는 보길도로 유배 가던 윤선도의 시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월출산 높다더니 미운 것이 안개로다. 천황제일봉을 일시에 가리니, 두어라 해 펴진 후면 안개 아니 거두리.’ 수려한 봉우리를 가리는 안개를 간신에 빗댄 내용이라 해석한다. 어쩌면 윤선도도 이곳부터 가팔라지는 산세에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한 구실을 찾은 게 아닐까.

천황사는 월출산 동쪽 산자락 좁은 터에 자리 잡았다. 고려 초기 사자사(獅子寺)로 시작된 사찰이지만, 지금은 2001년 화재 이후 새로 지은 전각 3채가 전부다. 오랜 역사에 비하면 수수한 절간이다.

천황사를 지나면 길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다. 구름다리로 가는 탐방로에 돌길과 계단이 이어지는데, 체감상 가파르기가 수직에 가깝다. 가벼웠던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고,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정상까지 가보겠다는 호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구름다리까지나 갈 수 있을지 염려할 지경이다. 바위 사이에 단풍이 곱지만 눈길을 끌지 못한다. 고작 900m를 걷는 데 40분 넘게 걸렸다.

구름다리에 당도하면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탄성으로 바뀐다. 주변 전망까지 더해 과연 월출산의 명물이다. 54m에 불과한 짧은 다리지만 등산객에게는 획기적으로 다리품을 줄인 고마운 존재다. 해발 510m에 위치한 다리는 높이 120m 협곡에 매달려 있다. 이 다리가 아니면 사자봉 등산이 그만큼 더 힘들었을 거라는 얘기다.

다리 좌우로 펼쳐지는 풍광 또한 압권이다. 왼쪽으로 사자봉이 우뚝하고, 오른쪽 건너편으로 육형제봉이 하얗게 능선을 형성하고 있다. 정면은 수직의 바위절벽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다. 까마득한 발아래 좁은 계곡에 단풍이 제법 고운데, 3면으로 둘러싸인 기암괴석에 압도돼 주목을 끌지 못한다. 바위가 풀이고 나무고 숲이다. 꽃이고 단풍이다.

이만하면 됐다 판단하고 하산하려 하는데, 길동무를 자처한 이영학 영암군청 건설지원팀장이 아쉬움이 남지 않겠냐며 한마디 던진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올라온 길에 비하면 완만한 편입니다.” 한 해 10여 차례 월출산을 오르는 베테랑의 조언이니 힘을 내 보기로 했다. 가장 가파른 사자봉 코스 대신 바람폭포와 육형제봉 전망대를 거쳐 가자고 제안했다. 구름다리에서 올라온 반대 방향으로 끝없이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는 길이다.


가파르기가 아찔하지만 바닥까지는 수월하게 내려갔는데, 바람폭포까지는 또 그만큼 올라야 한다. 바람폭포는 높이 15m의 암벽에서 떨어진다. 수직의 물줄기가 골짜기에서 치받는 바람에 흩날린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장엄한 물줄기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실처럼 가는 물줄기 몇 가닥이 겨우 흘러내릴 뿐이었다.

폭포에서 가파른 돌길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육형제봉 전망대다. 왼쪽으로 여섯 개 바위봉우리가 기묘한 모양으로 능선을 이루고, 정면으로 지나온 구름다리가 눈 아래 밟힌다. 구름다리를 중턱에 두고 골짜기에서 솟구친 사자봉이 아찔하고도 우람하다. 전망대에서 또 조금만 가면 산 능선이다. 맞은편으로 드넓게 펼쳐지는 평야가 월출산의 깊은 바위 골짜기와 대조적이다.

정상을 코앞에 두고 바위 사이를 통과하는 통천문까지는 다시 한번 고비다. 한 발짝 디딜 때마다 신발이 계단에 쩍쩍 달라붙는 듯하다. 통천문을 지나 짧은 내리막과 오르막을 거치면 드디어 정상이다. 서편으로 펼쳐지는 산세는 지나온 구간과 또 다른 풍광을 선물한다. 구정봉 기암 너머로 영산강 하류 물길이 아련하게 보인다. 북쪽 영암 읍내 방향으로 펼쳐지는 평야도 끝없이 넓어진다.

<영암=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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