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망각의 동물

2022-11-17 (목) 안세라(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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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 높던 어느 날, 남편과 드라이브를 하면서 신호에 걸려 잠시 대기중이였다. 그런데 같이 정차한 옆 차 안에서 갓난아기가 고래고래 울고 있었다. 창문 넘어 그 소리가 들릴 만큼 우는 소리가 꽤 컸다. “아이유, 애기 엄마가 너무 힘들겠다”라고 말하니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말한다. “세라야, 우리 애들 기억 안나? 우리 둘째는 저것보다 더 크게 울었는데.” 순간 내 자신에게 놀랐다. 그래, 생각해보면 우리 아이들이 그랬던 것도 같은데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이 나지 않고 마치 남편이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둘째가 그렇게 울었다고? 저 아이처럼 저렇게 울었다고?’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둘째가 겨우 세살인데 나는 겨우 삼년 전 일도 기억을 못하게 된 것일까?

남편과도 마찬가지이다. 결혼한 지 겨우(?) 7년이 되었지만, 결혼생활을 그만두고 싶었을 때가 분명히 있었다. 크게 싸우면서 등을 돌리고 잤던 적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도대체가 그 이유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남편의 어떤 점 때문에 싸우게 됐는지 뭐가 맞지 않아서 그렇게 서로 날카로운 날을 세우고 몇 일 밤을 속상해 했는지 이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흔히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한다. 독일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을 보면 우리 인간들의 기억의 수치를 잘 볼 수 있는데, 그 사실이 참 흥미롭다. 우리는 단 일주일만에 기억의 80퍼센트를 망각한다는 것이다. 나는 911 응급차를 타고 영화같은 상황에 첫째 아들을 만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리라, 마치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출산의 경험도 어느덧 그 기억을 잊고 다시 둘째 아들을 만난것을 보면, 이정도면 망각은 인간 생존의 조건, 적어도 나의 생존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다퉈서 등을 돌렸으면서도 지금 사이좋게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학습한 것을 더 오랜 시간동안 기억하기 위해서는 반복 학습만이 해법이라고 한다. 슬프고 좋지 않았던 순간을 더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에 반복 학습 따위는 당연히 필요가 없겠다. 망각곡선을 달리 보면 시간은 늘 흘러가고 있고, 영원한 기억이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내 생활, 매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게 느껴진다. 오늘 하루도 행복했던가. 오늘 하루 나의 남편과 나의 아들들과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을 많이 가졌던가. “예스!” 그럼 된 거다. 매일이 ‘예스!’가 될 수 있게 더 노력해야겠다.

<안세라(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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