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내 아버지는 서울에 갈 때마다 성마른 기색을 드러냈다. 자동차의 글로브박스에 지도를 넣고 다녀야 했던 90년대 초 이야기다. 스마트폰은커녕 내비게이션도 출시되지 않았던 시절, 우리 가족은 서울만 들어서면 늘 길을 헤맸다. 반가운 교통체증을 만날 때마다 조수석에 앉은 어머니는 창문을 열고 옆의 택시기사에게 길을 물었다. “면목동 가려면 어디서 빠져야 해요?” 친절한 답변이 돌아왔지만 운전사인 아버지는 영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문제는 번호판이었다. 우리 가족이 탄 현대차 프레스토의 초록색 번호판에는 네 자리 숫자와 더불어 ‘강원’이라는 글씨가 선명히 적혀있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강원도 사람이 서울 와서 길 물어보면 무시받기 십상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서울 친척집까지 가는 길은 두 개의 세계가 계속 충돌했다. 어머니는 모르면 물어보자는 실용 노선이었고 아버지는 아무 도움 없이 스스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주 노선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실용주의자로 정의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의 정신에도 공감한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분명 강원도 사람의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다. 시골이라 불리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역에서 나고 자랐지만 강원도에서 내 아버지는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겠다는 포부를 다졌을 것이다. 아버지의 육체는 더이상 이 세상에 없지만 아버지의 정신은 내 마음에 남았다.
강원도 사람으로서 나는 2년 전 실리콘밸리 근무를 앞두고 지역 대선배 한 분의 미국 체류기를 대단히 인상깊게 읽었다. 그는 1955년 3월, 대한해운공사의 선원 자격으로 미국 땅을 밟은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이다.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과 같은 세련된 시로 유명한 박인환이 20세기 중반 미국을 여행하고 체류기까지 남긴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박인환은 시인으로, 영화평론가로, 책방 주인으로, 신문사 기자로 생계를 이어가지만 변변치 않자 대한해운공사에서 사원으로 사무를 본다. 그의 예술가적 재능을 아낀 사장은 박인환에게 선원 자격을 부여해 배를 타고 미국까지 갈 기회를 마련해준다. 그때 남긴 박인환의 기록이 '19일 간의 아메리카'다.
나는 1955년 3월 22일, 미국 워싱턴주의 올림피아 항(Port of Olympia)에 도착한 대한민국 ‘남해호’를 떠올린다. 남해호에는 선원 박인환이 타고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만 2년도 되지 않은 시점, 폐허가 된 모국을 잠시 떠나 초강대국에 도착한 지식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정박을 앞두고 ‘태평양에서’라는 자신의 글에서 자문한다. “과연 무엇이 우리들을 아니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나는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가.” 사실 박인환의 별명은 ‘명동백작’이자 ‘댄디보이’였다. 그만큼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문화를 좋아했다. 자주 마신 술은 ‘조니워커’였으며 즐겨핀 담배는 ‘카멜’이었고 눈여긴 배우는 ‘험프리 보가트’였다. 박인환은 누구보다 먼저 실용적으로 미국문화와 현대 문학기법을 받아들였다. 참여시인 김수영한테 ‘유행 숭배자’라는 경멸스런 말을 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박인환의 미국 체류기에서 전후 지식인으로서 모국의 정신적 자긍심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를 엿본다. 1955년 5월, 신문에 실린 글에서 박인환은 이렇게 서술한다. “아메리카 전반의 문화수준은 우리와 비할 수가 없으나 그러나 우리들이 조금도 정신적으로 뒤떨어져 있다고는 믿고 싶지가 않다. 그들이 노래하고 춤추고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할 때 우리들은 열심히 지식을 흡수한다면 아메리카 문화와 다른 새로운 문화가 우리나라에 생기고 사회와 가정의 생활이 높아질 것이다.” 2년 전 실리콘밸리 근무를 준비하며 이 문장을 처음 접한 나는 울컥했다. 7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울림이 있다.
70년 전 박인환이 자문한 질문을 2023년을 앞두고 나도 마주한다.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지역에서 나는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가. 질문이 세계를 규정한다. 무엇이 ‘보이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가’다. 나는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이 곳의 거대한 뿌리를 찾으려 한다. 그 뿌리에서 실리콘밸리를 뛰어넘는 또 다른 흐름이 생겨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흐름이 대한민국에서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실리콘밸리의 트렌드를 좇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실리콘밸리의 본질이 유행을 재빨리 흡수해 아류가 되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내겠다는 마음에 있다고 확신한다. 기왕 시인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시인의 문장을 인용해 마무리하겠다. 아일랜드의 시인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말이다. “유행이란 참을 수 없이 추해서 6개월마다 바꿔주어야 한다(Fashion is a form of ugliness so intolerable that we have to alter it every six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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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진/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