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해산의 기쁨

2022-11-13 (일) 양주옥(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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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일 있으면 내 생일이다. 우리 딸은 엄마가 원하는 것을 해 주고 싶다며 한 달 전부터 뭘 하고 싶은지 이야기하란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생일이 되었다고 하고 싶은 게 뭐가 있을까. 그저 멀리 있는 아들네 식구까지 한 상에 둘러앉아 밥 한 끼 먹을 수 있다면 그게 최고의 행복이겠지.... 아이들이 출가하면 그런 소소한 바람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것을 안다. 그저 마음에 담아둘 뿐이다.

딸이 이른 생일 선물이라며 예쁜 스웨터를 사다 주었는데, 잘 맞지 않아 바쁜 아이와 모처럼 집을 나섰다. 오랜만의 쇼핑이 낯설기도 했지만 오가는 길 딸과의 시간은 즐겁기만 했다. 평소엔 손주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대화할 시간이 없었는데 둘 만의 나들이는 밀린 이야기들을 풀어내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아이들을 돌봐 준다고 고마워하며 일년 내내 생일처럼 챙겨주는 딸에게 선물을 받자니 엄마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얘, 해 준 것도 없이 생일이라고 이렇게 받는 게 너무 염치가 없다. 너희가 아이들에게 하는 걸 보면 우리는 정말 부족한 게 많았어. 돌아보면 더 잘 해 주지 못해 미안하고, 이민 온 지 얼마 안돼서 미국을 잘 몰랐던 게 너무 미안해. 그런데 나이 들어 이렇게 받기만 해서 엄마 맘이 좀 그래...” 딸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딸이 대답한다. “그 당시엔 그게 최선이었어. 우리가 최고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엄마, 아빠가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건 알아. 그럼 됐지. 시대가 다르잖아. 이젠 우리가 부모님 챙기고 엄마는 받는 세대가 된 거지. 미안해 하지 말고 누리면 돼.” 딸의 말에 목이 메어 눈물을 삼켰다.


이 세상 수많은 여성들은 아들, 딸을 낳고, 엄마가 되어 사랑을 주다가 때가 되면 이렇게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해산의 고통을 평생 기억하는 엄마를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이 주는 기쁨, 행복, 추억들은 엄마로 일생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해산의 고통을 지울 만큼 충분히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는 해산의 고통이 아닌 기쁨을 누리는 엄마로 태어났음이 가장 큰 행복이고, 그런 행복을 알게 해 준 아이들이 또한 가장 큰 선물이다. 아마도 모든 엄마들의 심정이 이와 같지 않을까.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나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이 곁에 계신다. 늘 주고도 더 주지 못해 팔십이 넘은 연세에도 반찬을 가져다 주시는 엄마. 생일이라면 태어난 나보다 낳느라 고생하신 엄마가 축하 받으셔야 하는 날이다. 이번 생일엔 두 분을 모시고 맛있는 식사라도 대접해 드려야겠다. 엄마, 아버지. 낳아 주셔서 감사해요.

<양주옥(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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