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실리콘밸리 스케치] 앞을 바라보고 안을 살펴보기

2022-11-03 (목) 김욱진/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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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오고 나서 가장 공들인 일은 하루를 시작하는 강력한 루틴을 만드는 것이었다. 실리콘밸리에서도 아침을 여는 나만의 의식(ritual)이 필요했다. 3년을 근무한다고 하지만 세분화해서 생각하면 1,095일 묵고 갈 뿐이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처럼 1,095번 나를 새롭게 할 수 있다면 자기혁신에 성공할 것으로 확신했다. 아침형 인간으로서 새벽시간을 고요하지만 의미있게 보낼 수 있는 장소부터 물색했다. 오전 대여섯시부터 커피나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글을 쓸 수 있는 작업실이 필요했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어야 하고 여행을 가서도 비슷한 곳을 손쉽게 찾을 수 있어야 했다. 몇 군데 카페를 돌면서 실험했지만 결론은 스타벅스였다. 스타벅스만큼 언제, 어디서든 일관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나는 출근도장 찍듯 눈을 뜨면 집 근처 스타벅스로 향한다.

지금의 스타벅스를 만든 사람은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다. 스타벅스를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그는 창업자가 아니다. 스타벅스는 1971년 젊은이 3명이 의기투합하며 탄생했다. 제리 볼드윈, 지브 시글, 고든 보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시애틀로 돌아간다. 대학 시절 즐겨찾던 커피숍 ‘피츠(Peet’s)’의 맛을 잊지 못해 시애틀에 가서도 원두를 우편으로 주문해 내려마셨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까지 원두가 배송되는 과정에서 향과 맛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세 명의 청년은 피츠를 모델로 삼아 커피원두를 파는 가게를 직접 열기로 결심한다. 이처럼 초창기 스타벅스는 커피원두 소매점이었다.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가 설립된 지 10년도 더 지난 1982년에 합류한다. 뉴욕 브루클린 노동자 가정 출신인 그는 스타벅스에서 실현하고 싶은 자신의 이상(理想)을 창업자들에게 설파한다. 스타벅스는 시애틀에서 커피원두를 파는 소매점 몇 개에 그칠 게 아니라 미국 전역, 나아가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문화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창업자들은 슐츠의 비전에 반대했다. 그들은 피츠로 대표되는 커피의 정통성에 집착했다. 한걸음 나아가 피츠커피를 인수하며 1987년 8월 스타벅스를 슐츠에게 파는 결정까지 내린다. 당시 하워드 슐츠가 스타벅스를 매입해 최고경영자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스타벅스 노스산호세 지점에서 이 글을 쓰고 있지 못할 것이다. 스타벅스는 아직도 시애틀의 원두 판매점에 머물렀을지 모를 일이다. 무엇이 창업자들과 슐츠의 차이를 만들었을까.


슐츠의 스타벅스는 전세계를 대표하는 압도적 커피 브랜드로 우뚝 섰다.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를 인수하고 딱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성장기를 담은 책을 낸다. 우리말로는 <스타벅스, 커피한잔에 담긴 성공신화>로 번역됐지만 원제는 <당신의 심장을 부어라(Pour your heart into it)>다. 슐츠가 스타벅스의 대표로서 초창기 가장 공들인 일은 ‘커피경험의 재창조(Reinventing the coffee experience)’였다. 하워드 슐츠는 언제나 앞을 바라봤다. 일부 고급 지식인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원두커피 문화를 미국 전역으로 전파할 수 있다는 담대한 마음을 가슴에 품었다. 그는 앞으로 커피숍이 보다 많은 이들이 소박한 여유를 즐기며 교류하고 낭만을 느끼는 오아시스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반면 제리 볼드윈을 비롯한 창업자 3인은 옛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대학을 다니던 시절 즐긴 피츠커피의 맛과 경험을 잊지 못하며 계속 뒤를 돌아봤다. 미래로 나아가려는 이와 과거로 회귀하려는 자가 있다. 혁신가는 누구일까. 당연히 전자다.

동시에 하워드 슐츠는 철저히 안을 살폈다. 자신이 몸담은 조직인 스타벅스 속에서 기회를 발굴하고 가능성을 키웠다. 3명의 창업자들이 밖으로 눈을 돌리며 피츠커피를 인수하는 일에 공들일 때, 슐츠는 스타벅스에서 실현할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 슐츠는 비전을 이렇게 정의했다. “당신이 보는 것을 다른 이가 보지 못할 때, 사람들은 그걸 비전이라 부른다(Vision is what they call it when others can’t see what you see)”고 말이다. 슐츠는 스타벅스의 내부자로서 창업자들이 보지 못한 미래가치를 내다봤다. 확신이 없던 창업자들은 피츠커피의 정통성에 의지해 외부에서 답을 구하려 애썼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하워드 슐츠는 “기업을 계속 키우려면 자기 자신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말한다. 난관을 맞거나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우리는 주로 밖에서 길을 찾으려 시도한다. 나의 결정을 남에게 위탁하는 방식은 쉽고 편하다. 하지만 하워드 슐츠의 스타벅스가 증명하듯이 해결의 실마리는 언제나 내 안에 있다.

<김욱진/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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