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어깨동무

2022-10-14 (금) 김미라(버클리문학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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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새벽 공기가 울 아버지 성난 입김처럼 쌀랑하다. 모든 게 풍성하고 울 엄마 자식 사랑만큼이나 뜨겁고 뜨겁던 여름이 엄마의 고운 심성처럼 말없이 물러갔다. 아마 자랑하고 싶은 자식들이 많아 홀연 비켜 주셨나 보다.

보고 듣는 것마다 아름다운 시가 되고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의 선생님이었던 바르고 대쪽같은 큰언니, 안고 다독이며 지긋한 사랑으로 교직 생활 30여년을 끝내고 오늘도 주옥 같은 시를 읊는 우리 집안의 자랑 큰언니, 천방지축 우리 칠남매의 맏딸로서 동생들 바람막이하랴, 부모님께 맏딸 노릇하랴, 웃고 울며 어린아이들 선생님하랴 힘들었던 큰언니는 언제나 흔들림 없고 심지가 바랐다.

반면에 공부는 뒷전이고 여고 무렵부터 맥주로 머리를 감고 햇살에 말려 노랗게 물들이고 짙은 화장을 하고, 어디서 구하기도 힘든 야시시한 옷들을 도깨비 시장(미국 보세 상품 파는 곳)에서 사 입거나 동네 바닥 쓸고 다닐 만큼 길고 통이 큰 나팔바지를 입고 빵집에 다방까지, 가끔은 가발을 쓰고 미성년자 금지 영화관을 들락날락거린 둘째언니는 어디로 튈지 몰라 온 가족을 노심초사하게 만들었다. 하루는 가발에 짙은 화장을 하고 통 큰 나팔바지를 입고 극장에 가려고 급히 나가려다 집 앞 골목길에서 아버지와 마주친 둘째언니를 아버지가 못 알아보고 지나갔던 일까지 있었다. 시쳇말로 둘째언니는 못 말리는 “꼴통!” 아버지에게 체벌도 수없이 받고 다시는 안그러겠다는 각서도 여러번 썼다. 꼴통언니가 마침내 “나중에 부모 원망 안하고 후회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각서를 촛물까지 들여가며 쓰자 아버지가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파란만장” 둘째언니는 우리 가족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달라도 너무 다른, 천사같이 착한 셋째언니, 꼭 엄마를 닮아 심성도 곱고 울보였다. 늘 아버지의 화풀이 대상이었던 순하디순한 언니. 꼴통 둘째언니의 죄를 수없이 뒤집어쓰기 일쑤, 게다가 꼴통 대신 아무 잘못도 없이 아버지에게 맞기도 하고 온 집안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별종 같은 막내 여동생인 나의 별난 성격도 다 받아주었다. 아버지나 둘째언니에게 당하는 게 마음이 아파 내가 가끔 “언니는 바보야!”라고 비웃고 무시해도 울기만 하던 천사였다.

어젯밤엔 스산한 바람이 불고 썰렁해 가을의 한기마저 느껴졌다. 문득 잎파리 붉게 물든 감나무를 기둥 삼아 숨바꼭질하던 우리 형제의 어린시절 모습이 떠올랐다. 미웠던 아버지도 인자했던 엄마도 잘난 큰언니도 꼴통 둘째언니도 천사표 셋째언니도 별종인 나도 이제는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고 그저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내 지난 추억들이 불그스레 익어가고 있다.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온 나날처럼 우리 가족은 그렇게 또 서로의 어깨를 다독일 것이다.

<김미라(버클리문학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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