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어쩌다 선생

2022-09-12 (월) 정혜선(몬트레이 국방외국어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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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두 달 전쯤 같은 사무실의 동료가 엄청 재밌다고 추천한 유튜브 강의를 보는데 강의가 나오는 프로그램의 제목이 “어쩌다 어른”이었다. 내가 먼저 만든 개념과 어구를 남들이 쓰고 있다고 느낄 만큼 공감가는 제목이었다. 친한 영어 원어민 친구한테 이 얘기를 하면서 즉흥적으로 “An accidental adult”로 번역했더니, 여러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고 하면서 좋아했다. 내 직업에 적용해서 “어쩌다 선생”이라고 해보니까 한국어 선생으로서의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몬트레이 국방외국어 대학교는 군사적 목적을 위해 외국어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다. 따라서 교과과정이 초고속, 초강도이고 학습기간에 비해 목표가 엄청 높아서 외국어 학습의 “boot camp” 같은 곳이다. 특히, 한국어 학교는 공부하기 힘들다는 “명성”이 자자해서 학생들이 잔뜩 겁을 먹고 들어온다. 게다가 한국말을 정말 배우고 싶어서 온 학생들보다는 “어쩌다 한국어 학생”이 된 경우가 훨씬 더 많고 언어공부의 기본인 암기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이 태반이다. 한마디로 “극한직업”이다. 그래서 사실 몇 달 전에 친한 동료 선생님과 만들어낸 농담이 있다. “정 선생님이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맨 정신으로는 가르칠 수 없어서 커피의 환각성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라는...

나는 학생 때 외국어 공부를 혼자 알아서 잘 했기 때문에 최근까지 그렇지 못한 학생들을 참고 인내하기가 가장 힘들었다. “어쩌다 선생”이 돼서 이 고생인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기 일쑤였다. 또 목표지향적이고 조급한 성격 때문에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내 수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안중에도 없이 다그치곤 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벼랑 끝에 선 학생들을 몇 명 구제하기도 했는데 대학원에서 배운 교수법보다는 학생들 개개인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포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후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의 괄목할 만한 성과는 선생님들이 계획했던 수업을 완전히 내려놓고 학생들의 피드백을 들은 후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었을 때 그리고 학생들을 믿고 각자가 배운 것을 정리할 수 있는 정신적 물리적 공간을 허용했을 때 나타났다. 학습의 효과는 소통과 존중을 통해서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출 때만이 극대화된다는 것을 학생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오늘은 구월의 첫 날, 우리 학교에서 정한 “스승의 날”이다. 선생이 뭔지도 모르고 “어쩌다 선생”이 된 나를 참아주고 진정한 선생으로 성장하게 해준 내가 가르쳤던 모든 학생들에게 감사하고 싶은 날이다.

<정혜선(몬트레이 국방외국어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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