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는 오늘날 원당암이라 불리는 곳이 시작하여 번창한 절이다. 원래 원당암은 봉황이 날개를 펴서 날고 있는 모습의 상서로운 자리라고 해서 봉서사(鳳捿寺)로, 신라 40대 애장왕이 머물면서 지었고 이후 진성여왕때 원당암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선조가 사명대사를 치하하여 내린 시호 “홍제”의 이름으로 홍제암(弘齊庵)이 또 건립되었다.
해인사의 대법당은 옛날 봉서사로 불리웠던 원당암의 바로 정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의 해인사 대법당으로 가려면 깊은 계곡을 건너야 했다. 지금은 큰 돌다리가 놓여 있지만 원래는 외나무 다리 하나만 놓여 있었다.
옛날에는 해인사로 가려면 홍제암으로 와서 계곡을 건너서 가야 했는데,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취했기에 모든 승려들은 하층민으로 전락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양반들이 해인사 안으로 말을 타고 들어와서 난장판을 벌려 승려들이 조용히 수행을 할 수가 없어도 불만을 이야기 할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큰 태풍으로 인해서 홍제암과 해인사를 연결하는 다리가 떠내려 가자 더이상 큰 다리를 놓지 않고 사람만 건널 수 있는 외나무 다리 하나만 놓자고 누군가 제안을 하여 외나무 다리 하나만 놓게 되었다.
이후 양반들도 모두다 조심 조심 걸어서 외나무 다리를 건너서 해인사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절에서는 이 외나무 다리를 지혜의 다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낮은 신분의 처지에서 강자의 횡포를 아주 단순하게 지혜로운 방법으로 대처하면서 오히려 해인사 출입을 더욱더 경건하게 만들었다. 그때 보다 훨씬더 복잡한 이해관계가 작동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도 강자의 횡포로 인하여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일단 강자의 갑질을 당하게 되면 화가나고 주먹부터 먼저 나갈수 있다. 혹은 법적인 분쟁으로 소송에 휘말릴수도 있다. 그런데 당시 감히 양반들과 눈도 마주 칠수 없는 천민의 처지에 있었던 승려들이 꾀를 내어서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 하였다.
인류의 문명이 과거에 비해서 눈부시게 발전을 하고 있지만 강자에 의한 갑질은 여전하다. 다수에 의한 소수에 대한 차별, 힘센 나라가 약한 나라에 대한 경제 봉쇄와 침략은 예나 지금이나 일어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발생하고, 약한 집단은 테러라는 방식으로 무작위 대중에 대한 공포스런 보복을 가한다. 그러면 강자들은 또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더 많은 희생의 댓가를 요구한다. 이렇듯 지금 세상은 강자든 약자든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물론 해인사의 지혜의 다리처럼 해결을 하려면 해결의 당사자들도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양반들 보다도 훨씬더 많이 일상적으로 외나무 다리를 건너야 하는 상황이고, 또 한꺼번에 수레로 운반하지 못하고 무거운 짐을 직접 지고 날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도 그렇게 함으로써 해인사는 승려들이 수행을 하는 사찰로서 자리를 지킬수 있었다.
지금 인류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심각하고 분쟁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특히 다수가 소수를 차별하고, 조그마한 차이를 가지고 침소봉대하여 아주 교묘하게 차별화 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개인과 집단들이 약자들에게 당당하게 소리를 지르고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당하는 입장에서 모든 것을 따져봐도 소수로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중과부적의 상황이라면 해인사의 지혜의 외나무 다리를 생각하면서 지혜로운 방안을 고민해 보는 노력이 필요한 시대다.
소수로서 다인종 다민족 사회속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고 있는 미주 한인들에게 필요한 방법이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남들이 유권자 등록 하지 않을 때 유권자 등록을 하고, 남들이 투표하지 않을 때 더 열심히 투표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바로 전략적인 투표를 통한 우리의 영향력의 확대이다. 그러면 정치인들이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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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시민참여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