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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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폭우 속에서

2022-08-16 (화) 이수진(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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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뉴스에서 호우주의보를 잠깐 보긴 했지만, 여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나는 숙소 근처 카페에서 출장 때문에 밀린 업무들을 확인하며 오후를 보낼 예정이었고, 예비 신랑 또한 저녁까지 현장 일을 마치고 서초동에 있는 나를 만나러 올 예정이었다. 다만 날씨 때문이었는지 현장에 습도가 높아지고 곰팡이가 슬어버려 오빠의 일정에 변수가 생겼고, 신랑이 예정보다 조금 더 일찍 나를 만나러 왔다. 덕분에 빨리 서울을 빠져나온 우리는 어머님을 뵈러 수원집을 찾았고, 어머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고추장찌개를 실컷 먹고, 디저트로 과일과 농담을 섞어 먹으며 무난한 저녁을 함께 보냈다.

느긋하게 일정을 마치고 밤늦게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노래를 골라가며 듣고 있는데, 양재천 근처쯤 왔을까 - 갑자기 빗물이 굵어지더니 차 유리창 너머로 도로 바닥에 물이 점점 차오르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엔 조금 찰랑이던 빗물이 불과 몇 분 사이에 바퀴의 3분의 2를 넘어 출렁거리기 시작하는데, 급기야 순간 앞에 있던 차들이 모두 멈춰 선다. 신호등이 몇 번이나 초록색으로 변했지만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고, 온 사방에서 차들이 비상등을 켜고 질서 없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뉴스를 검색해 보니 여기저기서 제보라며 올라오는 속보들이 초 단위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하필이면 지금 묵고 있는 숙소 뒷골목이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잠겨버렸다는 뉴스, 강남역 일대가 침수되어 차와 버스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 사진, 지하철역 천장이 무너지는 영상…. 말 그대로 ‘갑자기’, 서울 하늘에 큰 구멍이 뚫리고 115년 만의 폭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교차로 바로 앞에 멈춰 있었던 우리는 운 좋게 방향을 틀어 부산 방면 고속도로로 빠져나와 단 몇 분의 차이로 패닉의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같은 순간, 누군가는 그러지 못해 물에 잠긴 차를 버리고 헤엄쳐 나오고, 물살에 휩쓸려 실종되고, 부딪혀 다치고, 빠져나오지 못해 사망했다. 만약 우리가 어머님과 여유롭게 저녁을 먹지 않고 예정대로 서울에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우리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공식으로 누군가에게는 내일이 주어지고, 누군가에게는 이별이 찾아오는 것이 인생이라면, 과연 평범한 하루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 매섭게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우리가 흘려보내듯 써온 오늘이라는 시간이 곧 기적의 연속이었고, 당연한 듯 스쳐 지나간 주변 풍경들이 곧 귀한 선물이었음을 실감한다.

<이수진(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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