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땅끝 마을, 그곳에서 시작

2022-08-09 (화) 이수진(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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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처음으로 대한민국 해남, 땅끝 마을에 다녀왔다. 서울에서부터 차로 약 4시간 반 정도 떨어져 있는 그곳에서 우리는 해남과 고성 지역에 작은 교회를 다니는 어린이들, 그리고 주변 마을에서 조부모와 함께 자라고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지난 이틀 동안 여름 영어 캠프를 진행했다. 우리 단체와 오랫동안 함께 인연을 만들어 온 중고등학생들과 사회 초년생들 또한 스태프로 참여하는 행사였기에, 더 묵직한 책임감을 손에 쥐고 우리 팀은 두륜산 밑 언저리에 자리한 숙소에 짐을 풀었다.

녹록지 않은 숙소 환경, 쏟아지는 폭우, 중구난방으로 공격하는 모기떼를 극복하고 캠프는 다행히 끝까지 잘 진행되었고, 그날 오후, 모두의 수고를 기념하기 위해 팀 전체가 함께 두륜산 케이블카를 타고 해남의 하늘길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를 무시하고 수직 승강 중인 케이블카 안에 서서 식은땀을 흘리며 푸르른 두륜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형용할 수 없는 대자연의 웅장함이, 저 산속에 둥지를 트고 있을 새들이, 살랑거리며 춤을 추고 있는 나무들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가파른 계단을 좀 더 올라 전망대까지 도착하자, 마치 대한민국 땅끝을 기념하기라도 하듯, 산과 바다와 하늘이 서로 부대끼며 만들어낸 완연한 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위로를 얻었다.

지난 2주간의 출장은 나에게 마치 두륜산과도 같았다. 낯선 환경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내 마음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물을 잔뜩 먹은 수건처럼 무거웠고, 새로운 음식과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이불과 새로운 샴푸에 마저도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내 몸과 24시간 내내 싸워야 했다. 다양한 활동을 경험해 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따뜻한 기억 하나 심어주고 싶다는 희망으로 이 악물고 버티고는 있었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열흘 동안 무섭게 덤비는 감정들을 타고 마지막까지 올라와보니, 그 어려움들이 어느새 서로 쌓여 내 안에 또 다른 시작이 되어 주었음을 깨닫는다.

두륜산 ‘힐링로드’라고도 불리는 전망대 산책길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 길을 걷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을 위해 계단 사이사이마다 좋은 명언들을 남겨두었다. 많은 명언 중 나는 ‘새로운 시간에는 새로운 마음을 담아야 한다’라는 말을 오랫동안 곱씹었다. 땅의 끝자락에서 갖게 된 새로운 마음들을 나 스스로 잊어버리지 않길 바라며.

<이수진(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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