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1970년이 저무는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요구한 절규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가슴에 안은 채 스스로 분신이라는 죽음으로 척박한 노동 현장의 개선을 요구했다. 당시에도 엄연히 근로기준법은 있었다. 1주일에 최대 60시간만 일해야 하고 1회 이상의 유급 휴일이 보장하는 내용은 있었지만 이를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23살 재단사 전태일은 당시 허울뿐인 근로기준법을 그렇게 자신의 몸과 함께 불사르면서 인간답게 살 권리를 외쳤다.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 당했던 노동자의 삶이 사회문제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전태일 열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들어 미국 노동 현장에서 불고 있는 노조 결성 열풍 때문이다.
최근 월스트릿저널(WSJ)은 올 상반기 스타벅스와 아마존 등 미국 사업장의 노조 결성이 2015년 이후 최대 수준이라고 전했다. 노사분쟁을 심판하는 노동관계위원회(NLRB)에 진정서를 제출한 사업장은 1,411개로 전년 동기에 비해 69%나 폭증했다.
한국 삼성그룹처럼 ‘무노조 경영’을 경영 원칙으로 삼고 있던 세계 최대 커피체인업체 스타벅스에서는 창사 이래 50년 만에 지난해 12월 뉴욕주 버펄로 소재 매장을 시작으로 노조 결성이 줄을 잇고 있다. NLRB에 진정서를 제출한 1,411곳 중 스타벅스 매장이 311곳으로 이중 노조 조직안 투표 결과 145개 매장에서 가결되고 22개 매장에서 부결됐다. 미국에서 피고용인 수가 두 번째로 많은 민간 기업 아마존도 뉴욕시 스태튼섬 창고 노동자들이 노조 설립 투표를 가결해 노조 결성에 성공했으며, 다른 주의 창고 노동자들도 노조를 추진 중이다.
노조 결성의 바람은 민간 기업을 넘어 미국 정치의 심장부인 연방 의회까지 불고 있다. 지난 18일 8명의 민주당 하원의원 사무실에 소속된 보좌진 85명은 의회직장권리사무소에 노조 설립 신청서를 제출했다. 의회에서 개별 의원 보좌진들의 노조 설립 권리를 부여하려는 움직임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노조 설립 시도가 현실화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인타운도 노조 결성 여파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난달 유명 한식당 겐와의 식당 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이 공식 설립됐다. 겐와 노조는 개인 소유 한인 식당 중 처음이다. 겐와 노조 설립으로 한인타운 내 550개 식당을 포함해 타업종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런 전망은 한 한인 마켓에서도 노조 결성 움직임이 포착되면서 현실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노조 결성의 바람이 불고 있는 데는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이 컸다. 코로나19 감염 우려와 이에 대응한 경기 부양 과정에서 일부 산업에서 구인난이 발생하며 임금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키울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이다. 그보다는 식당이나 마켓과 같은 서비스 직종을 중심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임금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에 대한 재평가를 하게 된 인식의 변화가 노조 결성의 가장 큰 동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노동 가치의 재평가는 임금 인상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노조의 임금 인상이 인플레이션을 더 심화시킨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노동자의 임금 인상을 인플레이션과 연관 짓는 것 자체가 현실의 왜곡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국 최대 노조 연합체인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조합회의(AFL-CIO)에 따르면 미국 대기업 CEO들의 지난해 연봉 인상률 18%는 같은 기간 미국의 인플레이션 상승률 7.1%를 두배 이상 뛰어넘는 과도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임금 노동자의 명목 임금은 4.7% 오르는데 그쳤다. S&P 500대 기업 최고경영자와 임금 노동자 사이에 임금 격차는 무려 324배에 달한다.
노조가 있다고 해서 임금 노동자들이 처한 척박한 현실은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주 한국의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이 합의로 마무리됐지만 이들의 요구는 관철되지 못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럼에도 이번 파업으로 조선 하청 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는 유효하다. 마치 52년 전 젊은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 알리고 싶었던 그 현실을 말이다.
임금 노동자들이 처한 척박한 현실과 노동 가치에 대한 저평가가 있는 한 노조 결성은 지속될지도 모른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비판도 있지만 그럼에도 임금 노동자들이 계란으로 바위를 계속 치는 것은 노조 결성이 진보를 이루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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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욱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