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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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한 박자 쉬어 가기

2022-07-14 (목) 김관숙(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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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기저귀를 갓 뗀 아기에서부터 정년퇴직을 한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바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다. 오죽하면 백수가 과로사(過勞死)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다 나왔겠는가. 좀 심하게 말하자면 바쁘지 않은 사람은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하는 것처럼 모두 바쁘다를 입에 달고 산다.

나는 딸이 둘이 있지만 어느 딸을 만나도 딸의 얼굴에 잡티가 생겼는지, 잔주름이 늘었는지 살필 겨를이 없다. 각자 아이가 셋이다 보니 제 새끼들 거두느라 정신 없는 딸과 얼굴 마주하고 말을 나누기도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 해서 하나도 섭섭하지 않다. 나는 나대로 바빠서 누가 내게 치댈까 몸을 사리면 사렸지 누군가에게 턱 받치고 놀아주기 바라는 성미가 아니다.

게다가 성질까지 급한 편이다. 오늘 뭐 뭐를 해야지 마음먹으면 그대로 해야 직성이 풀린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전자 메일도 받는 즉시 답을 보낸다. 나중에, 다음에 하고 미루는 건 내 직성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미루다 잊어버려서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속셈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내 할 일 모두 해내는 슈퍼 우먼도 물론 아니다. 아니, 서둘러서 오히려 실수를 하거나 낭패를 보는 일도 허다하다. 말도 빨라서 상대방이 묻는 말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지레 짐작으로 답변을 하다 보니 늘 실수요 실언의 연속이다.

어느 날, 멀리 있는 친구에게 카드와 함께 작은 선물을 받았다. 이름 있는 날이라고 보내 준 선물이 고맙기는 했지만 상대방의 넉넉하지 못한 형편을 아는 터라 기쁘기보다는 마음이 짠했다. 평소 습관대로 그 자리에서 전자 메일로 답장을 보낸 건 좋았는데 마음 짠한 내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서 보낸 것이다. 그리고 몇 시간도 되기 전에 나는 후회했다. 그저 고마운 마음만 전하면 좋았을 것을 공연히 주절거리며 내 짠한 마음을 드러내서 상대에게 오히려 상처를 준 건 아닌지 하는 후회 말이다. 그 자리에서 답장을 보낼 게 아니라 조금 여유를 두고 생각했더라면,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도 선물을 보낸, 보내고 싶었던 그의 진심을 헤아릴 여유를 가졌더라면 나는 그저 철없는 아이처럼 기뻐만 하면 좋았을 것이다. 친구는 그걸 기대했을지도 모르는 거였다.

한 박자 쉬어 가는 여유! 그때 비로소 내가 얼마나 여유 없게 사는지, 바쁘다를 입에 달고 살지만 실상은 몸이 바쁜 게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김관숙(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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