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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2022-07-07 (목) 이상용 (오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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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 법무부장관 후보 청문회 때 일이다. 첫 질문자로 나선 민주당 고민정 의원이 법무부가 영어로 무엇이냐고 물으니, 한 장관이 저스티스(Justice)라 답변했다. 영어 능력을 보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질문도 우문이고 대답도 오답이다. 법무부는 영어로 Ministry of justice라 해야 한다. 하지만 그대로 넘어갔다. 질문자가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 이해를 못할 질문이었다. Justice 하나만 놓고 보면 공평성 정당성 정의의 판단을 말하는 것이며 즉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법률이라고 본다. 여기서 정의란 말이 나온다. 정의의 참뜻이 무엇이냐 묻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정의를 잣대로 국사를 집행하는 사람이 정의의 사상이 얼마나 심재해 있는지 가늠해 보는 것이 중요했다.

정의에 관한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단종이 삼촌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과정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정의를 지키려 했지만 이미 대세가 기운 처지에 성삼문, 박팽년 등 여섯 사람이 노량진 새남터에서 죽임을 당하고 역적으로 몰려 그들의 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하여 아들 손자는 다 죽임을 당하고 여자들만 남았다. 특히 성삼문의 아내는 당대 문인으로 알려졌고 양반가의 안방마님으로 부엌일은 손 한번 대보지 못했는데 어린 딸과 함께 양반집 노비로 귀속되어 남의 집 부엌바닥에서 생을 이어갔다. 추후 영양실조로 앞 못보는 맹인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비통할 일이다. 사육신 본인들의 죽음은 물론 그의 가족 그리고 역적은 삼족을 멸한다 하니 수백명이 죽었을 것이다.

다수의 생명을 위해 1명을 희생한다면 혹 뜻있는 희생이라고 할른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의 의도로 이뤄진다면 공리주의에 빠져 여론의 희생물이 되기 쉽다. 정의로운 일이라 할 수 없다. 1명을 살리기 위해 여러 명이 희생되는 것은 더더욱 정의로운 일이라 할 수 없다.


바티칸 궁전의 브르너 신부는 지동설을 주장하여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대는 땅이 움직인다고 설파하는 것을 믿는가?” 네 하면 죽고 아니요 하면 산다. 그는 정의를 부정할 수 없어 “네” 했다. 결국 그는 이단으로 몰려 화형 당했다. 마찬가지로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같은 죄목으로 바티칸 종교재판에 회부돼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정의를 숨기고 “아니오”라고 했다. 그는 곧바로 석방돼 나오면서 문을 닫고 유명한 말을 남기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것은 임기응변의 기지이다.

칸트는 정의란 “Justlce is nothing but stronger’s advantage” 정의란 강자의 편익이다, 힘없는 정의란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힘없이 정의만 부르짖어 봐야 정의는 서지 못하고 강자에게 패하고 만다. 많은 희생을 감수하는 것은 올바른 정의 구현이 아니다.

노자의 말을 들어보자. 其無正 正復爲奇 善復爲妖 人之迷 其日固久(기무정 정복위기 선복위요 인지미 기일고구), 언제나 올바름은 없다 올바름이 바뀌어 기이함이 되고 선한 것이 뒤집히면 요망함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사람은 잘못된 생각을 오랫동안 지니게 된다. 무엇이 진정 옳음인지 모르면서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중국 위(衛)라 임금이 미자하(彌子瑕)라는 소년을 총애하여 늘 곁에 두고 지냈다. 임금이 미자하를 데리고 복숭아밭을 갔다. 미자하가 복숭아를 따서 맛을 보고 임금에게 맛을 보라고 했다. 임금이 맛을 보니 맛이 좋았다. 임금님 타는 전용 수레를 누구든 허가없이 타면 발목을 자르는 형벌을 내린다는 법령이 있었다. 그런데 시골에 있는 미자하의 어머니가 병이 위중하다는 기별을 받고 임금님 수레를 허가없이 타고 갔다 왔다. 임금님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 수레를 몰고가는데 누가 감히 나서서 말릴 것인가. 어느 날 임금은 모든 신하들을 모아놓고 미자하가 자기가 먹던 복숭아를 너무 맛있다고 나에게 내밀어 먹어본 일이 있다면서 얼마나 꾸밈없는 진정한 마음 표시인가, 그리고 발목을 잘리는 형벌이 있음을 알고도 임금의 수레로 제 어머니 문병을 갔다 왔으니 그의 효심을 갸륵하지 않은가 칭찬했다.

세월이 흘러 미자하가 임금의 눈에 미워지기 시작했다. 저 놈을 벌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하들에게 물었다. “저 놈이 지난날 자기가 먹던 복숭아를 나에게 먹인 일이 있다. 어찌하면 좋은고?”, “임금님에 불충한 죄로 장 30대를 맞아야 합니다.” “임금의 수레를 허가없이 탄 죄는?” “발목을 자르는 형입니다.” “그대로 시행하라”, 얼마 전까지 임금님의 칭찬을 한몸에 받아온 그가 복숭아와 수레 사건으로 이제는 임금에게 불충한 죄로 곤장 30대와 발목을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미자하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절망에 빠진다. 올바름의 잣대는 늘 강자에게 있음을 말해준다.

지난 보수당 정권 때는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했고 진보당 문재인 정권시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4년 7개월 옥고를 치렀고 이명박 대통령도 옥중에 있었다. 바로 힘있는 정권의 정의 실현이 아니겠는가...

<이상용 (오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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