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다가올 즈음이면 아직도 생각나는 얼굴이 있다. 동부에 있었을 때, 교회 ’청년 믿음회’에 속했던 혼혈아 청년 멜빈 브라운이다. 철부지 여대생이 우연히 창경궁에서 만난 백인 장교와 화창한 고궁을 거닐었고 식사 후 맥주 한잔을 함께 나눈 날 실수로 낳았다는 혼혈아. 미군 장교와는 소식이 단절되고 집안의 결정으로 아기는, 쉬쉬하며 여기저기 돌려지며 자랐다. 그후 그녀는 결혼해서 딸 하나를 낳고 이혼으로 끝나, 캐나다에서 딸과 둘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사이에 두고 미국 쪽 국경 도시 버팔로에 살고 있는 아들을 지켜보며 살았다.
단정한 용모에 온순한 성품으로 유학생들이 대부분이었던 ‘청년 믿음회’의 일원인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늘 한구석에서 조용했던 멜빈. 그때 캄보디아에서 온 왜소한 청년 한 명이 더 있어서 그 둘을 의식해, ‘대학원생 그룹’의 명칭을 ‘청년 믿음회’로 바꿨던 것 같다.
멜빈이 우울증으로 약 복용을 시작한 즈음의 몹시 추웠던 어느 정월, 나이아가라 근처 루이스턴의 신경외과 닥터 Y로부터 연락이 왔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청년의 시신이 병원 시신소로 운반되어 왔는데, 혹 최근 실종된 젊은이가 있는지 아시안 커뮤니티에 알아보고 있단다.
그리고 다음날 그 시신이 바로 멜빈 브라운이라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 드러났다. 바로 전날 캐나다에서 방문하러 온다는 이복 여동생의 연락을 받은 멜빈이 너무 기뻐 마중하러 달려나갔다가, 마침 눈이 내리기 시작한 저녁 시간 달려오는 차를 못보고 그대로 차에 부딪혀 수백야드를 끌려가며 종잇장처럼 구겨져 죽어갔다는 서글픈 이야기이다.
캐나다에서 그 어머니가 달려왔고 ‘청년 믿음회’ 맴버들이며 다 모였을 때, 그녀가 절규하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다리 건너 바로 이웃인데,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하는 국제전화라고 그 요금 걱정하던 불쌍한 내 아들...” 꺽꺽 울음을 삼키던 그녀 앞에서 벙어리가 되었던 우리들.
그 혹한 속의 옛 이야기가 아직도 이렇게 사무치는 이유는 무모한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죽음과 6.25 전쟁이 남긴 멜빈의 뼈아픈 삶이 무관치 않아서일까.
얼마 전, 서울의 한 친구가 5월의 끝자락을 꽃보다 아름다운 춤추는 초록의 계절이라고 찬가하는 글을 읽었다. 나도 이제는 6.25 전쟁이 남긴 구렁이 같은 긴 상흔을 훨훨 떠나 보내고 싶다. 그리고 나도 전쟁과 무관한 눈부신 6월의 찬가를 가슴이 먹먹하도록 한껏 불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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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옥(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