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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나의 6.25 이야기

2022-06-27 (월) 이상용 (오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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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꺼지는 진동과 쇳덩어리 부딪히는 으르렁 소리와 함께 검은 괴물의 큰 덩치가 미아리 고개에 나타났다. 그리고 줄지어 돈암동 쪽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랜 나는 옆길로 피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것이 탱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참 뒤에야 방송을 듣고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해 남침했다는 것을 알았다. 북에서 온 인민군은 미아리 고개로 처음 넘어왔고 서울은 졸지에 인민군 천하가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6시 10분경, 내가 16살 중학교 2학년 때 일이다.
5남 1녀 중 막내인 나는 부모님은 물론 혈육인 형제들은 다 사망하고 이제 나홀로 남아 있다.

6.25 발발 당시 나는 서울 북방 수색 기차역 조금 지나 화전리(花田里)에 셋째 형님이 운영하던 정미소에서 셋째 형수님과 어머니, 2살 터울 넷째 형하고 같이 살았다. 셋째 형님은 군에 입대한 상태였다. 아버지는 청량리 큰형님댁에 기거하시고 양쪽을 왕래하셨다. 어느 날 아버지는 큰집을 떠나 막내아들집에 오던 중 행방불명돼서 불효막심한 자식의 한을 안고 산다. 시가전이 벌어진 와중에 희생되신 것이 분명했다. 2살 터울 친구 같았던 형은 방위군에서 굶어죽고 행방불명 처리되었으니 가족들이 밥을 먹어도 넘어가지 않았다. 거의 같은 시기에 아버지 그리고 넷째 형을 잃고 오늘날까지 가슴에 묻고 산다.

화전리 정미소는 인민군이 점령하면 그들의 군량미를 찧었고 그들이 후퇴하면 국군의 군량미를 찧었다. 아직 어린 내가 셋째 형수님을 모시고 정미소 일을 했다. 인민군 치하에 동네 청년들이 팔에 빨간 완장을 두르고 죽창을 들고 돌아다니며 동네 유지들을 마당에 잡아놓고 주민들 모이라고 하면 얼떨결에 불려 나갔다. 인민재판이 벌어지고 사람들을 죽창으로 찔러 넘어트렸다. 죽창을 들고 있던 청년들 중에는 낯익은 사람도 있었다.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남하했다가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으로 서울을 회복하고 국군은 북진을 계속했다. 화전리에는 화물차 등을 보관 수리하는 넓은 시설이 있었고 큰 굴이 있었다. 인민군이 상당히 많은 인원이 퇴각하면서 그 굴 안에서 기진맥진하여 쉬고 있을 때 미 공군에서 어찌 알았는지 당시 쌕쌕이라 불리는 전투기 겸 폭격기가 갑자기 나타나 기관포를 그 굴 속으로 집중사격했다. 후에 그 굴 속을 찾아가 보니 소년같이 어린 인민군들이 모두 새카맣게 타 죽어 있었다.

전세는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했지만 중국 팔로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계속하여 1951년 참혹한 1.4후퇴가 벌어졌다. 그 행렬에 우리도 끼어 남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해가 바뀌어 나도 17살이 되었다. 어머니, 셋째 형수님, 그리고 2살배기 조카딸, 갓 나은 2개월 조카아들, 나까지 다섯이 피난길에 합류했다. 큰형님댁과 만나지 못한 채 각자 피난길에 나선 것이다. 둘째 형님댁은 소식이 끊긴 지 오래였다.

추위는 점점 더 극심해지고 피난길 속도는 더뎠다. 그 피난길에 형수님 등에 업힌 아이가 그만 숨지고 말았다. 졸지에 닥친 비참한 현실에 땅에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피난 인파는 사정없이 계속 밀려왔다. 결국 모두 눈물범벅으로 철로 옆 자갈밭을 손으로 헤쳐 이불보째 아이를 묻었다. 우리 가족은 그사이 네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겨우 한강을 건너 도착한 곳이 군포였다. 밤은 한데서 지낼 수 없어 민가로 무조건 접어들어 하소연한 끝에 작은 문간방을 얻어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따로 피난길에 나선 큰형님 가족을 그 집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다음날 대가족이 같이 피난길에 나서 걷고 걸었다.

중공군도 더 이상 남진을 못하여 전선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우리 대가족은 장항을 거쳐 군산에 도착하여 피난민수용소 군산중학교 교실에 가족마다 두평 정도 할당받아 담요를 깔고 어려운 피난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피난민 가족마다 젊은 사람은 징병으로, 나이 먹은 사람은 노무역으로 징발장이 나왔다. 우리집엔 큰형님이 KSC 노무부대 징집 영장이 나왔다. 집집마다 가장들이 뽑히고 나니 여기저기 눈물바다였다. 큰형님은 조카들까지 다섯명이나 되고 9명 식구가 형님 하나에 매달렸다.

나는 그 길로 병무 사무실을 찾아갔다. 우리집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고 영장을 바꿔 가지고 가족 앞으로 달려 왔다. 가족들이 다 환호하고 좋아하는데 어머니의 낯빛이 어두웠다. 나는 어머니에게 괜찮다고 위로했다. 큰형수님은 나에게 고마워하면서도 수심이 가득했다.

나는 1951년 1월 12일 군산 역에서 객차도 아닌 창문 하나 없는 방통차에 실려 달리고 달려 어딘지 모르지만 이번엔 트럭으로 갈아타고 내리니 까마귀들이 시신을 쪼아먹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가 바로 양구 철원 금화 피의 전선 철의 삼각지였다.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났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린 나이에 어른들과 같이 노무부대에 나간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이상용 (오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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