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소설가인 헤밍웨이의 장편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는 19세 때 자신의 경험을 모티브로 해 쓴 작품이다. 주인공 프레더릭 헨리는 야전병원 운전사로 전선에서 두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입원한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던 간호사 캐서린 버클리와 사랑에 빠진다. 캐서린의 임신을 안 두 사람은 탈주하여 전쟁이 없는 스위스에서 겨울의 목가적인 생활을 즐기고 봄에 출산할 예정이었지만 제왕절개 수술 도중 캐서린은 사산을 하면서 죽음을 맞고 만다.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적 작품으로 헤밍웨이를 당대 최고의 문학가 반열에 올려 놓은 작품이다.
무기(arms)로 상징되는 전쟁으로 인해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헨리의 패배감은 요즘 총기난사 사건으로 충격에 빠진 한인들과 미국인들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비영리단체 ‘총기폭력 아카이브’(Gun Violence Archive)에 따르면, 올해 들어서만 미국에서는 지난 5일 기준 244건의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이중 33건은 지난달 학생 19명과 교사 2명이 사망한 텍사스 유밸리 초등학교 참사 이후에 발생해 더욱 충격이다.
총기난사 사건은 최근 들어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700건이 달하는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2020년 611건, 2019년 417건에 비해 급증한 수치다.
총기난사 사건이 끊이지 않는 데는 미국의 민간 총기 소지율이 전 세계에서 최상위에 있다는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2017년 국제 무기연구단체 ‘스몰 암스 서베이’(SAS) 자료에 따르면 인구 15만 이상 국가 중 100명당 총기 소지 비율은 미국이 120.5명으로 1위다, 2위는 예멘(52.8명)으로 2배 넘게 차이가 났다.
전체 민간 총기 개수도 미국이 압도적으로 1위다. 같은 해 기준 미국은 3억9,330만여개로 7,110만개로 2위인 인도보다 5배 넘게 많은 총기를 갖고 있다.
연방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지난 2020년 총기 관련 사고로 사망한 젊은 미국인은 교통 사고 사망자보다 많은 4,300여명이라고 밝혀 총기로 인한 목숨을 잃는 것이 이젠 일상화가 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세계 최고 일등국이라는 미국에서 끔찍한 총기난사 사건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총기 규제와 관련해 하나도 바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이 전미총기연합회(NRA)의 돈과 로비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남북전쟁 직후인 1871년 북군 장성들의 주도로 결성된 NRA는 151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회원수는 500만 명으로 추산될 정도로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등 10명의 대통령이 NRA 회원일 정도로 미국 내에서 막강한 인맥을 구축하고 있다.
지난 2020년 한해 지출 예산이 2억5,000만달러인 NRA는 미국 내 모든 총기 규제 옹호 단체를 합한 예산 보다 더 많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공화당 의원을 중심으로 물량 공세를 펼치고 있다.
미국의 수정헌법 2조도 총기난사가 계속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총기 소지를 주장하는 이들의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정헌법 2조는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지하고 휴대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를 침해해선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여기에 총을 자기방어 수단 겸 자유주의 상징으로 여기는 미국인 특유의 정서까지 더해지면서 총기 규제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엔 뭔가 달라질 수 있을까? 지난 12일 연방 상원에서 총기 규제 입법 협상을 진행해온 민주, 공화 양당의 상원의원 20명은 안전한 총기 사용을 위한 9가지 초당적 규제 조치에 합의했지만 세부 법안 문구 작성 과정에서 마찰이 생길 수도 있어 통과 가능성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러는 사이 총기난사 사건은 술집, 극장, 학교, 교회, 법원, 직장, 병원으로 확장되면서 우리 생활권 전체가 총기난사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에 놓였다.
미국에 여행객으로 오면서 배웠던 문장은 ‘쌩큐’와 ‘익스큐스 미’였다. 아마도 이젠 여기에 ‘돈 슛’(Don‘t shoot)을 하나 더 추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것도 총기 난사범의 자비심에 달려 있으니 효력이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헨리가 작별을 고한 그 ’무기‘에 대해 우리는 언제쯤 ’무기여 잘 있거라‘는 작별의 말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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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욱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