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후배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잠시 경유하는 상상을 한다. 함께 주어진 네다섯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베이지역에서 딱 한군데를 방문할 수 있다면 어디를 데려갈까. 고민은 오래가지 않는다. 나는 힌트를 얻기 위해 내가 처음 실리콘밸리에 도착하던 때를 반추한다.
2021년 1월 28일, 대한항공 KE025편 32E번 좌석에 앉은 나는 미지(未知)의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미디어를 통해 더없이 익숙한 미국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37년이 지나도록 아메리카 땅을 밟아본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이란 생활 5년은 미국행을 실행하는 내게 꼭 오점처럼 느껴졌다. 나는 스스로 너무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란 근무이력을 미국 입국시에 철저히 숨겼다. 나는 정정당당했지만 내가 이란에서 무엇을 했는지 구구절절이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슴을 졸이며 여권심사대를 무사히 통과했다.
여장을 풀자마자 출근을 시작했다. 빠르게 시차를 극복하려던 나는 마음이 급했다. 실리콘밸리에 도착하고 맞이한 첫 주말, 야심차게 가져온 자전거를 끌고 하얏트호텔 산타클라라 지점 밖을 나섰다. 나만의 방식으로 신고식을 하고 싶었다. 목적지는 샌프란시스코. 조금이라도 날이 서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낯선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면 나는 적응할 것이고 적응을 마친 나는 안정을 찾을 것이고 안정을 찾은 나는 무뎌질 것이 분명했다. 사서 고생하기로 결심하고 속으로 되뇌었다.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샌프란시스코까지 간다.’
자동차를 처음 대량생산한 미국, 전기차로 미래를 앞당기는 실리콘밸리라지만 여기에도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자전거족을 위해 형성된 237번 고속도로 옆 전용도로(Highway 237 Bikeway)를 따라 밀피타스까지 내달렸다. 밀피타스에는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베이지역 급행열차(BART) 정거장이 자리하고 있다. 열차에 올라타서 자전거를 묶었다. 나 말고도 여러 사람이 자전거와 동행했다. 내심 놀랐다. ‘내가 관념적으로 생각해온 미국과 실제 모습은 차이가 있겠구나.’ 한정된 미국생활의 관건은 근무하는 동안 인식과 실재의 괴리를 얼마나 좁힐 수 있는가가 될 것이었다. 자세부터 바로잡았다.
급행열차는 기대만큼 빠르지 않았지만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도착했다. 엠바카데로(Embarcadero) 역에 내린 나는 부둣가를 따라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많은 사람이 주말을 맞아 부두(pier)와 부두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관광객이 운집한 피어39도 지났지만 조금도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나는 바다를 바라보고 싶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 태평양을 조망하고 싶었다.
강릉 사람인 나는 평생 집 앞 바다를 태평양으로 생각하고 살아왔지만 대학에 들어가서 서울 친구들에게 동해는 태평양이 아니라는 반박에 부딪혔다. 공식적으로 동해는 태평양의 연안해다. 그럼에도 나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북태평양의 본류를 보고 싶었다. 샌프란시스코 일정의 첫 번째 행선지는 골든게이트 브릿지여야만 했다.
태평양을 보러 올라간 금문교에서 나는 바다 대신 생사의 기로에 놓인 사람을 위한 문구 하나에 사로잡혔다. “THERE IS HOPE.” 우리말로는 뭐라 번역할 수 있을까. 희망은 있다? 희망이 있다? 희망도 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담담한 삶의 태도를 내포하고 있는 “희망이 있다”를 선택하겠다.
골든게이트 브릿지는 골드러시 때 금맥을 찾아떠난 개척자 정신을 상징한다. 금문교는 역설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많은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2006년 영화 감독 에릭 스틸(Eric Steel)은 금문교에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더 브릿지(The Bridge)’를 발표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선 사 람들을 향해 나는 어떤 한 마디를 건넬 수 있을까?
다양한 문장을 생각해 봤지만 “희망이 있다(There is hope)” 이상을 떠올릴 수 없다. 이는 사실 내가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지난 1년, 미국 생활은 쉽지 않았다. 창업가와 엔지니어의 실리콘밸리에서 사회학도가 설 자리는 좁았다. 무대가 절실했던 나는 5년 간의 이란 시절을 그리워했다. 힘들 때마다 금문교에서 마주친 슬로건을 떠올렸다. 나는 다시 걷는 사람의 자세와 쓰는 사람의 정신을 생각한다.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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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