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박자박 소웁탐방 - 미스터리로 가득한 의성 금성면
세상에는 보고도 믿지 못할 것들이 수두룩하다. 자료가 빈약해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과학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흔히 ‘탑리’라 부르는 의성 금성면은 지질과 고대 인류의 무수한 수수께끼를 품고 있는 곳이다.
■시간을 거스른 듯한 ‘탑리’ 풍경
먼저 탑리역으로 간다. 중앙선 무궁화호 열차가 상·하행선에 각 4회 정차하는 시골역이지만, 외형은 흔히 떠올리는 간이역과 다르다. 벽돌을 쌓은 흉내를 냈지만 탑도 아니고 성도 아닌 콘크리트 외벽이다. 멋진 작품을 구상했다가 서둘러 마무리한 듯한 느낌이다.
역이 위치한 곳은 금성면 소재지이지만 현지인도 외지인도 ‘금성’보다는 ‘탑리’가 익숙하다. 학교 우체국 약국 꽃집 다방 식당 등 마을의 점포 이름에도 ‘탑리’가 대세다. 모두가 시장 뒤편 야트막한 둔덕에 우뚝 선 석탑에 대한 헌사다.
낮은 기단에 간결한 몸매, 국보로 지정된 탑의 공식 명칭은 ‘탑리리 오층석탑’이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전탑과 목조건축의 특징을 동시에 보여주는 구조다.
응회암을 얇게 잘라 층층으로 쌓은 모양새며, 1층 몸돌에 불상을 모시는 감실을 설치하고, 아래위로 층을 이룬 지붕돌은 전형적인 전탑 양식이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가 살짝 들린 건 목조건축에 쓰이는 기법이다.
탑이 세워진 것은 7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순수한 불심으로 돌을 다듬고 한 층 한 층 정성스럽게 쌓았을 그 옛날 석공의 마음은 헤아릴 길이 없다. 주변 터는 제법 넓지만 절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모든 시선은 탑에 모아진다.
자체로 하나가 절인 셈이다. 동네 소공원처럼 깔끔하게 정비해 놓았지만 찾는 이가 드물다. 그럼에도 상호와 지명으로 ‘탑리’를 활용하고 있으니 주민들에게는 생활 신앙이나 마찬가지다.
■공룡 발자국 옆 잊힌 왕국의 고분군
인근에는 탑리리 오층석탑보다 더 수수께끼 같은 유적도 있다. 탑리에서 의성으로 이어지는 도로 왼쪽에 여러 기의 대형 봉분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의성 금성면 고분군’이 정식 명칭이지만 주로 ‘조문국사적지’로 불린다.
조문국(召文國)은 웬만큼 역사를 꿰고 있는 사람에게도 낯설다. 기록이 많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벌휴이사금 원년(185)에 신라에 복속했다고 짧게 언급된 정도다. 삼한시대 의성 지역에서 번성했던 부족국가로 추정할 뿐이다. 그럼에도 유적은 풍성해 금성면 대리리, 탑리리, 학미리 일대에서 발견된 크고 작은 고분이 370기가 넘는다.
1960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 장신구와 철제 무기류, 마구류 등이 출토됐다. 조문국은 2세기 말에 막을 내렸지만 무덤은 4~6세기 것으로 보고 있다.
의문투성이 시간의 간극을 덮기 좋은 재료는 전설이다. 대표 고분인 조문국 경덕왕릉(신라 경덕왕이 아니다) 발견 과정이 조선 숙종 때 학자인 미수 허목의 문집에 기록돼 있다.
한 농부가 오이밭에서 커다란 구멍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석실 한가운데에 금관을 쓴 인물상이 있었다. 탐을 낸 농부의 손은 금관에 그대로 붙어버렸다. 그날 밤 의성현령의 꿈에 경덕왕이 나타나 정체를 밝혔고, 이후 봉분을 쌓고 관리했다고 한다. 실제 영조 원년(1725) 경덕왕릉을 증축하고 그때부터 지내온 왕릉 제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조문국사적지에는 38기의 고분을 정비해 공원처럼 꾸며 놓았다. 능선은 야트막하고 봉분을 따라 연결된 산책로는 물결처럼 부드럽다.
소풍하듯 가볍게 둘러볼 수 있다. 군데군데 소나무 몇 그루를 남겨 두었지만 무덤이라는 특성상 그늘이 부족하다. 요즘 같은 날에는 양산이 필수다. 해 질 무렵 방문하면 2,000년 잠에서 깨어난 ‘잊힌 왕국’의 미스터리가 더 신비스럽게 다가온다.
주차장 부근에 ‘문익점면작기념비’가 있다. 1935년 일제강점기에 목화 재배를 독려하기 위해 세웠다. 문익점이 장인과 함께 목화를 시험 재배한 곳은 고향인 산청인데 이곳에 비석이 선 이유는 뭘까. 조선 태종 때 그의 손자 문승로가 의성현감으로 부임해 일대에서 면화를 재배했다니 전혀 뜬금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의성은 목화 대신 작약의 주산지다.
고분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인류의 역사를 무색하게 하는 공룡 유적이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오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다.
약 1억1,000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 중기에 형성된 경상분지의 하천과 범람원 퇴적층에 300개 이상의 공룡 발자국이 선명하다. 높이 30m 경사진 암반에 작게는 지름 10cm, 큰 것은 90cm나 되는 발자국이 무더기로 모여 있다. 4종류 12마리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밀집도에서 국내 최고 수준이다.
공룡발자국은 1998년 지방도로 확장 공사 중 산허리를 깎아내면서 발견됐다. 때문에 관람 환경은 좋지 않다. 길가에 임시로 차를 댈 공간이 있을 뿐 공식 주차장이 없다. 차량 통행이 적어 다행이지만 무단으로 도로를 건너야 할 형편이어서 주의가 필요하다.
■30도 날씨에도 등골 서늘, 빙계계곡
탑리에서 약 10㎞ 떨어진 빙계계곡 역시 오래된 자연의 신비다. 얼음구멍(氷穴)과 바람구멍(風穴)에서 한여름에도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찬바람이 술술 새나온다. 경사면에 쌓인 암괴 틈에 저장된 찬 공기가 여름철에 외부의 더운 공기와 만나 물방울과 얼음을 만드는 자연현상이라 설명한다. 과학적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이해하기 더 어렵다. 최소 6,500만 년 전에 만들어진 지형이라니 인간의 역사로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이다.
입구의 빙계서원부터 상류의 풍혈까지는 약 500m, 계곡과 나란한 길을 걷기만 해도 도로변 바위틈에서 새나오는 찬바람이 감지된다.
한여름이면 자리싸움이 치열할 듯하다. 가장 차가운 빙혈은 마을 뒤편에 위치한다. 훼손을 막기 위해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해 내부는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지난달 27일, 낮 기온은 30도에 육박하는데 안에 매달아 놓은 온도계는 1.9~2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냉장고보다 차가운 곳이다.
빙계계곡 가는 길의 산운마을은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영천 이씨 집성촌으로, 한옥과 돌담으로 어우러진 정취가 고즈넉하다.
마을 중앙에 운곡당이 자리 잡고 있다. 영월부사를 지낸 이희발의 집이라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한 가벽(내외담)과 향나무, 정갈한 마당과 마루에 양반가의 기품이 배어 있다. 뒷마당 담장 너머로는 삿갓처럼 봉긋한 금성산이 우람하면서도 아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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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글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