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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스케치] 의미를 만드는 동물

2022-05-20 (금) 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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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전 5시 45분, 북(北)산호세 1번가의 스타벅스 리버오크스점에서 블랙커피를 마시며 글을 쓴다. 마감에 쫓기면서 씽크패드(ThinkPad)의 자판을 분주히 두들긴다. 출근 전까지 2,000자 분량의 원고를 마무리해야 한다. 남은 시간은 120분 남짓,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미국 근무를 시작하고 아침을 시작하는 의식(ritual)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실리콘밸리 생활 1년 반이 다 되어가는 지금, 어느 정도 틀을 잡았다고 자평한다. 초저녁 잠이 많은 나는 9시만 되면 졸리다. 여가를 보내기에 안성맞춤인 캘리포니아에 살지만 저녁에 뭔가 의미있는 활동을 하는 것은 내게 불가능에 가깝다. 대신 일찍 잠에 빠지는 만큼 빨리 눈을 뜬다. 기상시각은 새벽 5시 남짓이다. 하루의 3분의 1을 잠으로 보내는 것은 낭비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온전한 정신으로 남은 3분의 2를 아껴쓰기 위한 밑받침이라고 답하겠다.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도 의사결정 과정에서 충분한 수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5시에 눈을 뜨면 최대한 빨리 집 밖으로 나서기 위해 주섬주섬 옷부터 챙겨입는다. 검은색 트레이닝복 바지와 목이 늘어진 반팔 티셔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야구모자와 나이키 후드점퍼가 주로 입는 단골메뉴다. 곤히 잠에 빠진 아내와 아이들이 깰까 봐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노트북 컴퓨터와 텀블러만 챙겨 조심스레 대문을 연다. 과달루페(Guadelupe) 강둑을 따라 15분쯤 걸으면 스타벅스에 도착한다. 지점마다 문 여는 시간이 다르지만 내가 아침을 보내는 리버오크스 스타벅스의 개점시각은 5시 30분이다. 첫 손님인 나는 두 명의 바리스타에게 출근도장을 찍듯 눈인사를 한다.


드립커피 ‘파이크 플레이스’를 시키고 내가 만든 지정석에 앉는다. 이미 나의 루틴을 파악한 점원은 얼음물까지 한 잔 내어준다. 매일 아침, 쓰디쓴 커피를 옆에 둔 채 씽크패드를 펴고 워드프로세스의 창을 연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지금은 어디쯤에 있나.’ 평생 답을 구하지 못할 거대한 질문을 마주하며 글쓰기를 존재의 수준기(水準器)로 삼는다. 다행히 내게는 함께 아침을 여는 동료들이 있다. 6시부터 스타벅스 제일 구석진 자리에서 애플 맥북을 켜고 코드를 짜는 엔지니어, 7시만 되면 항상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 나타나는 할아버지, 전자제품 장비회사의 빨간색 로고가 박힌 가운을 입고 야외 테라스에 앉아 아이스 커피를 마시는 연구원까지. 자신만의 루틴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반갑다. 나이가 들어도 강퍅함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으로서 동질감을 느낀다.

스타벅스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운 인물은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다. 슐츠가 창업자들에게 제시한 비전이 바로 ‘문화공간’이다. 스타벅스는 시애틀에서 시작했지만 베이에어리어에 있는 피츠(Peet’s) 커피가 모델이 됐다. 제리 볼드윈, 지브 시글, 고든 보커까지 세 명의 창업자는 샌프란시스코 대학에 다니던 시절 즐기던 피츠 커피의 맛을 잊지 못했다. 대학 졸업 후 시애틀로 돌아간 그들은 피츠의 원두를 우편으로 받아 커피를 내려 마셨다. 공수해 오는 과정에서 커피 맛이 떨어지자 셋은 직접 원두를 파는 가게를 열자고 의기투합한다. 1971년, 스타벅스가 마침내 문을 연다. 뉴욕 출신 슐츠는 1982년 스타벅스에 합류했다. 뒤늦게 들어왔지만 슐츠는 강력한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스타벅스는 단순히 신선한 원두를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문화를 파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 명의 창업자가 커피의 정통성에 집착했다면 슐츠는 커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결과적으로 스타벅스는 세상에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적 문화공간이자 휴식처가 됐다. <걸어서 실리콘밸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스타벅스를 기점으로 삼아 동선을 짰다. 걷다가 화장실이 급할 때면 지도 앱을 열고 스타벅스가 어딨는지부터 검색했다.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떨어지면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전화기를 충전했다. 하버드대학 도서관장을 역임한 로버트 단턴은 “인간은 의미를 만드는 동물(Man is a meaning-making animal)”이라고 정의했다. 하워드 슐츠는 커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나는 오늘 내 인생의 무슨 의미를 만들 것인가. 일단 출근 준비부터 해야겠다.

<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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