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너리 제조실에 들어가니 기계화된 실내의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그 순간, 깃털처럼 가벼운 그 무언가가 심연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뭐지?.....마침내 뽀글뽀글 포도가 익어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실제로 그런 소리가 나는지, 다른 사람도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다. 분명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내 영혼의 방 문이 스르르 열림을 깨달았다.
서울에서 무시무시한 6.25 전쟁을 고스란히 겪고 중공군이 몰려온다 하여 그제야 보따리 꾸려 피난을 간 곳이 대구였다. 당시 대구에는 피난민들이 몰려 방을 구하기가 힘들었던가 보았다. 어머니와 우리 삼 남매가 겨우 얻어 들었던 방은 안방과 미닫이 하나 사이인 작은 방이었다. 방세를 받고 빌려줄 만한 구조가 아니어서 가족들의 프라이버시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층계 두엇을 내려가야 하는 흙 바닥의 부엌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이사하고 며칠 뒤 개 코라 불리던 내 후각이 감지한 냄새는 시큼한 그 무엇이었다. 그 시큼한 냄새의 정체는 다름아닌 부엌 살강 밑에 묻어둔 독에서 풍기는 막걸리 냄새였다.
연로하신 주인 할매는 정지 바닥에 큰 독을 묻어 놓고 며칠에 한 번씩 약전시장에 나가 찹쌀을 사다 꼬드밥을 지어 술을 담갔다. 밀주였다. 할매의 술 빚는 솜씨가 남달랐던지 인근 부대의 군인들이 단골로 드나들었다. 군인들이 때로는 할매에게 등짝을 맞아 가며 안주를 청해 안방 문지방에 앉아 마시고 가기도 했다.
할매는 동네 아이들이 어른 심부름으로 술을 사러 오면 양은 주전자가 넘치도록 술을 담아주고도 니 까자 사 묵어라, 하시며 돈을 받지 않았다. 어머니 친구분들이 놀러 오면 찌그러진 주전자에 막걸리를 담아 슬며시 방에 들여놓기도 했다. 술 맛이 그만이라고 환호하면 얼마든지 퍼다 묵어라, 하시곤 할매는 안방에서 낮잠을 청했다.
피난민 학생들이 다니는 분교도, 생활환경도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열악했지만 부족한 게 무언지 모르고 자랐다. 부지런하고 생활력 강한 어머니 덕분이었을 게다. 어머니는 전쟁 미망인이나 납북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네가 찾아오면 함께 울며 그들의 아픔을 나누었다. 부족한 가운데 나누어 먹고 도우며 살던 그 시절이 내게는 가장 풍요로웠던 기억으로 영혼의 방에 저장되어 있다. 와이너리에서 들었던, 뽀글뽀글은 포도가 익어가는 소리가 아닌, 할매의 밀주 항아리에서 거품 꽃이 피던 소리였다.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마트에 가면 생필품이 넘쳐 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가끔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뜬금없이 찾아오는 어떤 결핍감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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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숙(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