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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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노포비아를 경계한다

2022-05-19 (목) 김종하 편집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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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갑부이던 도널드 트럼프가 예상을 뒤엎고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던 해인 지난 2016년, 올해의 단어에 외국인 또는 이민자 혐오를 뜻하는 ‘제노포비아(xenophobia)’가 선정됐었다. 온라인 영어사전 ‘딕셔너리 닷컴’에서 그해 전 세계 이용자들이 많이 찾아 본 단어를 분석해보니 그렇게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스 어원의 이 말은 낯선 것을 지칭하는 ‘제노’와 싫어한다는 뜻의 ‘포비아’의 합성어로, ‘외래인 혐오 현상’ 또는 ‘이방인 공포증’을 일컫는다. 2016년 당시는 국경장벽 건설 등을 기치로 백인들의 반이민 정서를 들쑤신 트럼프 대선후보의 등장에다 영국의 브렉시트 가결, 시리아 난민 위기, 그리고 미국 경찰의 비무장 흑인 총격 등 사건들이 겹쳐지며 이 단어가 부각됐었다는 게 그해 보도에 기록된 내용이다.

생경하기 그지없는 이 단어의 망령이 미국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지난 주말 뉴욕주 버펄로의 흑인 지역 마켓에서 벌어진 인종증오 총기난사 사건이 터지면서다. 총격범은 올해 18세 밖에 되지 않은 백인 청소년이었는데, 그가 흑인과 이민자를 증오하며 이같은 극악한 인종혐오 범죄를 저지른 배경에는 이른바 ‘대전환론(The Great Replacement)’으로 불리는 백인우월주의 음모론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대전환론이란 유럽에서 시작된 극우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10여 년 전 프랑스에서 한 극우 논객이 ‘유럽 문화를 이민자들이 파괴한다’는 주장을 담아 발간한 책 제목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세계를 좌우하는 어떤 파워 세력이 아프리카와 중동계 이민자들을 유럽에 유입시켜 이들의 인구를 늘림으로써 결국 백인들을 대체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같은 음모론은 이후 전 세계 극우 백인우월주의자들 사이에서 신봉의 대상이 됐고, 여기에 심취한 극단주의자들이 일으킨 대규모 학살 사건들이 터져 나왔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바로 77명이 사망한 2011년 노르웨이 캠프장 총기난사와 지난 2019년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지역 이슬람 교당에서 51명의 희생자를 낸 총격 사건이었다. 이번 버펄로 총기참사의 범인도 뉴질랜드 총기난사범을 모방해 총격 상황을 생중계하고 유색인종은 미국을 떠나야 한다는 매니페스토까지 똑같이 따라서 발표하는 등 이같은 음모론의 연장선상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문제는 백인우월 음모론이 극우 성향의 극단주의자들 사이에서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점이라는 게 사회문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반이민 정서 자극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선거 전략이었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거니와, 최근에는 일부 공화당 소속 연방의원 등 정치인들과 폭스뉴스로 대표되는 보수 성향 매체의 일부 강성 방송인들까지 공공연하게 이를 언급하며 백인들의 잠재적 위기의식을 뒤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미국의 극우적 방송인이 TV에서 공공연하게 반이민 주장을 떠들었던 것은 이전에도 있었다. 지난해까지 폭스뉴스의 진행자 중 한 명이었던 루 답스는 17년 전이던 지난 2005년 CNN 간판 앵커 시절 수백만 가구가 시청하는 뉴스 방송에서 불법 이민자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소위 ‘이민자들의 침공’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었다.

그는 당시 멕시코 국경을 넘어 오는 이민자들 때문에 미국 내에 나병이 급증하고 있고, 전국 연방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범죄자들 가운데 이민자들이 3분의 1에 달한다는 등 근거가 희박한 통계들을 들먹이며 마치 이민자들이 역병을 옮기는 범죄자 집단인 것 같은 인상을 주며 ‘제노포비아’를 부추기는 행태를 보였다. 코로나 사태를 거치며 아시안 대상 증오범죄가 급증한 것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로 부르며 초기 방역정책 실패를 호도한 것과 같은 또 다른 형태의 제노포비아가 불러온 결과로 볼 수 있다.

이같은 이민자 및 소수계 혐오 조장하기가 더욱 위험한 것은 최근 광란적 총기난사 사건들이 미 전역에서 더욱 자주 빈발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번 버펄로 사건과 같은 극단적 폭력으로 터져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갈수록 악화되는 총기폭력의 심각성 속에서도 총기규제의 목소리는 매번 허공을 맴돌 뿐인 상황이 맞물려 비극의 사이클을 만들어내고 있다.

팬데믹 사태 와중에 터진 조지아주 애틀랜타 스파 총격 참사는 ‘아시안 증오’에 대한 전국적 경각심을 일깨웠는데, 최근 텍사스주 달라스의 한인 미용실에서도 아시안 대상 증오심에 사로잡힌 남성의 무차별 총격이 발생한 것은, 증오와 총기폭력이라는 2가지가 결합할 때 언제 어디서든 무고한 희생들이 또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다.

언제까지 이같은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그 어느 때보다 제노포비아의 광기를 경계하고, 총기 규제를 통해 총기 폭력을 멈추게 하기 위한 경각심과 목소리가 필요할 때다.

<김종하 편집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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