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법률 칼럼] ‘빈센트 친 재판’의 흑역사

2022-05-17 (화) 손경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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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연방의회는 미국의 건설과 화합에 기여한 아태계 이민자들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매년 5월 한 달을 ‘아시아태평양계 문화유산의 달’로 1990년 지정했다. 특별히 올해는 ‘빈센트 친(Vincent Chin)’ 폭행 사건의 4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서 가슴 아픈 아시안 재판 흑역사의 한 토막을 조명해본다.

중국계 미국인 빈센트 친은 미국 자동차 산업의 메카 디트로이트에서 주중에는 엔지니어로, 주말에는 식당 웨이터로 투잡을 뛰며 열심히 살던 27세의 청년이었다. 자신의 결혼식을 9일 남겨둔 1982년 6월19일 빈센트는 친구들과 디트로이트 시내의 한 스트립바에서 총각파티를 열었다.

보도에 따르면 빈센트가 쇼를 공연한 스트립걸에게 팁을 두둑하게 주자 옆 좌석에 있던 백인 로널드 에번스가 욕을 퍼붓고 스트립걸에게 ‘더 이상 빈센트 앞에서 춤을 추지 말라’고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당시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 감독관이었던 로널드는 자동차 공장에서 해고된 자신의 양아들 마이클 니츠와 함께 이 술집을 찾았다.


로널드의 시비는 술집 경비원의 만류로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술집을 나온 로널드 부자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 인근 맥도널드에 있는 빈센트를 뒤 쫓아와 양아들은 빈센트를 붙잡고, 로널드는 “우리가 일자리를 잃은 것은 너 같은 놈들 때문이야”라고 지껄이며 빈센트의 머리와 가슴 등을 야구 방망이로 여러 차례 가격했다.

두개골 파열로 병원으로 옮겨진 빈센트는 4일 후 사망하고 말았다. 빈센트는 의식을 잃기 전 “공평하지 않다(it’s not fair)”고 친구들에게 되뇌었다고 한다.

1983년 2급 살인 혐의로 기소된 로널드 부자는 플리바게닝을 통해 자신들의 살인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과실사고였다고 주장했다. 재판장은 과거 미육군 항공기 조종사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가 일본군 포로로 잡혀 18개월간 고생한 적이 있는 백인 찰스 카프맨이었다.

카프맨 판사는 “이들은 감옥에 보낼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죄에 맞는 벌을 내릴 게 아니라, 죄인에 맞는 벌을 내려야 한다”며 로널드와 마이클에게 각각 3년 보호감찰과 3,000달러의 벌금형만을 선고했다. 빈센트와 같이 살고 있던 홀어머니에게 선고일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재판 결과가 알려지자 이에 격분한 중국, 필리핀, 베트남계 등 아시안 커뮤니티는 ‘정의를 위한 미국 시민들(American Citizens for Justice)’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끈질긴 판결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이 같은 아시안의 단합된 힘은 로널드 부자를 연방법정에 다시 세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연방 민권법과 증오범죄법 위반으로 유죄를 받게 하려면 로널드 부자의 범행동기가 빈센트의 인종, 피부색 등에 기인하였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했는데 이게 여의치 않았다. 결국 로널드만 25년형의 유죄 판결을 받게 하는데 그치고, 양아들 마이클은 무죄가 되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어진 항소심에서 로널드까지 25년형에서 무죄로 뒤집혀 재판이 종결됐다는 점이다. 아시안 변호사가 검사측 증인을 사주한 정황이 있고, 로널드가 과거 어느 술집에서 흑인에게 ‘검둥이(nigger)’라고 욕한 전력을 검사가 찾아내 증거로 제출했는데 이게 배심원들에게 편견을 가지게 했다는 이유였다.

이 사건을 통해 아시안끼리 단합의 계기가 조성된 것은 ‘빈센트 친’이 남긴 소중한 아시안 유산으로 평가된다.

<손경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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