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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에세이] “내가 중독자라고?”

2022-05-12 (목)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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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더러 운동중독자래요, 참-.” 화난 얼굴에 대머리가 좀 벗겨진 중년 남성이다. “누가 그러는데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누라와 심리 상담사가 그럽디다.”

중년이 되자 그는 매일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회사 일을 마치고 집에 오는 도중 꼭 헬스클럽에 들러 운동을 했다. 점점 운동량이 늘고 운동시간도 길어져 저녁식사 바로 전에야 집에 들어왔다. 주말에는 운동을 더 오래 더 많이 했다. 아내가 운동 좀 적게 하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운동을 안 하면 몸이 늘어지는 것 같고 기분도 안 좋았기 때문이다.

최근 휴가 여행 중 여행보다 운동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을 보고 아내의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당신 운동중독자 같으니 전문가를 만나 상의해보라”고 다그쳤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심리상담사를 만났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심리상담사가 운동중독이니 치료를 받으라는 조언을 하자 “밥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는 당신도 밥 중독자이니 치료를 받으라”고 소리치며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런 뒤 정신과 의사의 의견을 물으러 온 것이었다.


지금 사회는 중독이란 단어를 너무 쉽게 쓰고 있다. 어떤 습관적 행동을 하거나 무슨 일에 열심히 몰입하면 그 앞에 중독이란 수식어를 붙인다. 춤 중독, 골프 중독, 샤핑 중독, 섹스 중독, 단음식 중독, 운동 중독 등 꽤 많다, 이중 운동 중독을 세계보건기구가 2019년에 정신질환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정신의료계는 아직까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술, 담배, 커피, 마약, 노름 중독들은 이미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인정되었다.

중독은 어떤 대상에 신체적 정신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상태며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속 반복된 행위를 충동적으로 하는 행위이다. 여기에 내성과 금단현상이 있어야 중독이라 정의한다. 내성은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해서 점점 더 큰 자극이 필요한 상황이고, 금단은 반복적 행동과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물질의 양을 크게 줄이거나 당장 끊으면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는 현상이다.

강박적 습관은 어떤 행위를 오래 되풀이하는 과정 중에 자기도 모르게 익혀지는 상태로 자신이 이를 통제하기가 매우 어렵다. 중독이 병이냐 강박적 습관이냐는 논쟁은 예전부터 계속되어 왔지만 운동중독을 병으로 분류한 뒤부터 더 뜨거워지고 있다.

병의 정의는 종교적, 문화적, 생물학적 견해에 따라 다르게 변화해왔다. 기독교는 신에 대한 불경죄, 불교는 타인에게 잘못한 행동의 대가라 가르쳤다, 동양의학은 음양오행이 망가져 신체 모든 장기들의 역할이 떨어지고, 서양의학은 세균 등 이물질로 인해 신체장기들의 구조적, 생리적 기능의 장애로 보았다. 그러나 동서양 의학 모두 여러 신체기능을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항상성(Homeostasis)이 무너지면 병이 생긴다는 의견에는 일치한다.

지금은 먼저 몸이나 정신에 주관적인 괴로움과 고통이 있어야 하고 신체적, 정신적 증상으로 인해 사회적, 직업적 기능이 현저히 떨어져 일상생활 전반에 지장을 주어야 병이라 칭한다. 물론 정신병 중 정신분열증과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경우 환자 자신은 괴로워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중독은 병이고, 강박적 습관은 어느 행위를 의식 상태에서 반복하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학습되는 고정된 행동반응 양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중독과 강박적 습관 모두 생리학적으로 쾌감, 성취감을 주는 뇌 영역이 활성화되어있다. 또한 뇌의 보상회로(Reward Brain Circuit)도 일치한다. 즉 중독과 강박적 습관은 생리적 현상이 같은 한 범주 내에 놓여있다고 본다. 굳이 구별하라면 중독은 신경 전달물질인 도파민이, 강박적 습관은 세로토닌이 보다 더 분비된다는 차이 뿐이다.

최근 정신질환 진단에 스펙트럼 장애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다. 햇빛을 프리즘에 비쳐보면 파장에 따라 한 범위 안에 7가지 색깔이 나타난다. 이처럼 근본적 원인은 같은데 증상의 심각도와 기간에 따라 개개의 환자가 다른 증상을 보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조현병 스펙트럼 장애, 자폐증 스펙트럼 장애 등 등이다. 이런 경향이 계속되면 정신질환 수가 지금 거의 300개 수준에서 20개 이하로 줄어들 수 있겠다.

그러니 앞의 중년남성도 그리 화낼 필요가 없다. 중독자란 말 듣기 싫으면 공식적으로 정신병이 아닌 강박적 습관 스펙트럼 증상일 수도 있으니까.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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