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다정다감하고도 깊다. 더욱이 자신보다 먼저 간 자식을 둔 어머니의 마음의 상처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인 트라우마속에서 슬픈 삶을 살아간다. 먼저 간 자식을 잊지 못해 마음 속에 묻어 둔 자식과 대화하며 살아가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나의 글에 담아본다.
“내 무덤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잠들어 있지 않아요. 난 천 개의 바람으로 불고 있어요. 눈밭 위에서 다이아먼드처럼 반짝이기도 하고, 익은 곡식위에 햇빛으로 내리기도 해요. 아침에 서둘러 당신이 깨어날 때 난 당신 곁에 조용히 다가와서 당신 주위를 맴돌거에요. 나는 밤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었어요. 사랑해요. 엄마.”
아일랜드의 독립전쟁 때 아일랜드 군대의 소년병이 닥쳐올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어머니를 위해 만든 이 시를 자기가 먹은 빵 겉봉지에 썼다고 한다.
전쟁에서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만큼 비통한 것이 있을까. 옛 사람들은 자식이 죽은 아픔을 칼로 창자를 저며내는 참척(慘慽)의 고통이라고 했다.
아마 이 아픔은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죽은 아들은 엄마를 향한 사랑이 가득한 시로 엄마의 비통한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해주고 있다. 엄마는 죽은 아들이 이별에 몸부림치며 엄마에게 보내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그래, 엄마는 울지 않아요. 아들아, 너는 죽은 것이 아니라 천 개의 바람으로 내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을 알아요. 부드러운 너의 바람이 나의 가슴에 와 닿으면, 나는 너를 나의 가슴에 꼬옥 안아줄 거에요. 이 엄마는 해가 진 밤하늘에 별이 총총 빛나는 중 너의 별을 볼 때, 이른 아침 햇빛이 동녘 하늘위로 비칠 때, 아침 밥을 먹을 때에도 너와 함께 내가 살아있음에 하나님께 감사한단다. 사랑한다, 나의 아들아.”
나는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죽은 아들이 대화하는 이야기를 읽고서, 6.25 전쟁 직후 세살배기 내 동생 원형이를 생각했다. 전쟁 후 사회가 지극히 피폐해져 각종 질병이 만연하여 폐허가 된 남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으며 죽어갔다.
원형이 홍역을 앓았다. 어린 아이의 온 몸에 새빨간 꽃이 돋고 엄청난 고열에 신음하며 동생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의사를 만났지만 특효약이나 방법이 없었다. 그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소문난 페니실린을 구하러 아버지는 사업으로 사용하는 트럭을 몰고 부산 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하야리아 부대를 찾아가 친구인 군무원에게 페니실린을 부탁했다. 군인들의 치료용으로 재고 전량을 사용하기 때문에 영외 판매는 불가하다는 답을 받았다.
며칠 후에 동생은 죽고말았다. 말 한마디 못하고 죽은 동생의 몸을 안고 어머니는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원형이 죽은 후 어머니는 한평생을 가슴에 큰 상처를 안고 사셨다. 천수를 다하시고 세상을 하직하기 직전, 어머니는 동생 원형의 이름을 세 번 부르시고 운명하셨다.
내 가족의 불행은 어머니에게만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 나에게로 다가왔다. 총명했던 큰아들이 28살에 중병으로 갑자기 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났다. 아들을 떠나보낸 후 나의 가슴에 깊게 뿌리내린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나는 엄청난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나는 이 비통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위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고, 글을 쓰고, 아들에게 못다한 사랑을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했다. 한 순간이라도 쉬면, 눈 앞에 아들이 나타나 아른거리기 때문이었다. 자식을 낳아보면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한다. 고희를 넘어 팔순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이제사 늦게나마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가이없는 사랑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나의 큰아들이 나에게 말한다.
“나를 위해 내 동생을, 내 엄마를,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을 도와주세요”라고.
어머니의 사랑을 가슴에 담고 그 사랑을 행하며, 비록 슬픈 인생일지라도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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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김 / 그린벨트,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