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라~ 고 녀석 국사공부도 아주 잘했구먼… 기특해’.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직하시고 이젠 구순으로 진해에 사시는 고모님이 작은누이 집의 아들인 조카 영재가 어린 시절 보여준 기백(?)이 가상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평생 처음으로 우리 삼남매는 내가 모는 차를 타고 샌프란에서 엘에이, 라스베가스, 그랜캐년, 데스 밸리를 돌아오는 2천마일 미국 여행을 함께 하고 있는 중이었다. 69세, 66세로 김해와 양산에 사는 두 누이를 초대해 미국구경을 시켜준다는 내 필생의 프로젝트로 실행에 옮겨 이렇게 11박 12일의 가족 여행을 하면서 나는 누이들의 입을 통해, 내 머리속 저~구석에 낙엽속에 숨어져 있던 잊었던 기억의 편린들을 다시 찾아낼 수 있었다.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짜릿하도록 소중한 것들이었다.
작은 누이가 부부싸움 할 때 일부러 모진 말을 하느라고 “근본도 없는 ‘집안인 주제에~!‘ 라는 말도 안되는 어이없는 소릴 입버릇 처럼 하면서 자형을 자주 닦아 세우곤 했더니 어느날 당시 초딩 5학년이었던 조카가 제 아버지를 편들어 준다면서 했다는 말이 걸작이었다. “신라를 말아먹은’ 경순왕의 셋째 아들 은설공의 후손인 경산 김가인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했다는 것이다.
멕시코 엔세나다 크루즈를 마치고 귀항한 선상에서 맛난 브렉퍼스트로 든든히 배를 채운 우리는 이윽고 배에서 내렸다. 춥고 배고팠던 6~70년대 빈한한 돈암동 산동네 생활을 함께 용케도 잘 버텨내고 함께 6~70대로 접어들어 이곳 미국에서 의기투합한 우리 삼남매는 곧장 숙소인 라스베가스 엠지엠 파크호텔로 향했다. 5시간의 운전길에 지루함도 깰 겸, 청소년기에 나와 늘 티격태격하며 앙숙이었던 3살 터울의 누이를 살살 놀리느라 착실하게 잘 자란 조카들이 왈가닥 누이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적당한 말이 없다고 했더니 누이가 킥킥 하면서 전해준 말이었다. 엄마가 살아 계셔서 같이 오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했더니 6살 위의 큰 누이는 살아 계시면 96세인데 여행하실 기력이나 있으셨겠나 한다.
나는 아직 기력이 남아있을 엄마도 한차에 타고 여행하는 상상을 해 본 것이었다. 문득 26년전인 1996년 부산역 인근의 범일동 조방(조선방직)앞 호텔의 스카이 라운지에서 엄마의 7순잔치를 하던 날이 떠올랐다. 단단히 운전대를 잡고 백미러를 가끔 보면서 조수석에 앉은 이제는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된 큰 누나를 훔쳐 봤더니 꿈속에서 뵌지도 7~8년이나 지나 거의 잊혀져 가던 엄마가 거기 앉아 있는 듯했다. 맞다 이제 보니 큰누나는 엄마를 닮았구나.
아버지의 사업실패후 부산 동대신동 부촌에 살던 사모님이 돈암동 산동네로 이사온 후 급전직하로 궁색한 생활전선에 내몰려 남대문 도깨비 시장에서 미제물품들을 떼어다 팔기도 했던 엄마는 항상 조신했는데 저리도 활달한 큰 누이는 대체 누구를 닮았을까, 크. 베가스로 향하는 도중 우리는 다이아몬드 바의 한남체인에 들렀다. 누이들에게 교포들이 이용하는 마켓도 구경 시켜주고 푸드코트 안에서 짜장면도 사먹고 또 아이스박스에 얼음도 채운 뒤 또 그렇게 즐거운 여행길 드라이브를 계속한 우리는 저녁 무렵 베가스의 호텔을 좀 지나 아리조나 주에 있는 웅장한 후버댐에 도착하였다.
대공황기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엔지니어 출신의 공화당 후버대통령이 뉴 딜정책의 일환으로 1931년 부터 5년간의 대 역사로 건설됐다는 댐은 엄청난 저수량을 자랑하는 규모도 규모지만 도저히 90년전 토목 공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현대적인 느낌을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기 약 10년전에 완공됐다는 댐을 바라보니 역사는 전설이 아니라 눈앞에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 댐이 완공된 5년 뒤 일본 제국주의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폭격을 했을 것이고, 또 13년 뒤 1949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 정권이 모택동에 패퇴해 눈물의 봇따리를 싸서 대만으로 피신을 해야 했을 것이다.
저녁시간이고 또 아직 본격 휴가철이 아니어선지 쓸쓸한 댐위를 걸으며 사진을 몇장 찍었을 뿐인데, 웬 강풍이 그리 부는지 얼굴이 얼얼해진 우리는 베가스에 다시 돌아와 메인 스트립선상의 한국식당에서 얼큰한 동태찌개 전골과 막걸리로 저녁식사를 맛나게 한 뒤 호텔에 체크인 하고는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다음날은 드디어 버켓리스트 목록 깨기의 제 1호 목적지인 그랜드 캐년으로 향했다. 장거리 운전에 젬병인 나에게는 근 다섯시간, 왕복 열시간의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본격 캐년을 들러 보기전 우리는 피크닉 구역에서 전날 한남체인에서 사온 삼겹살을 구워 소주파티를 하고 신라면과 커피도 끓여 먹으며 어릴적 이야기로 담소를 했다.
신흥사 입구 쌀집 길건너 언덕의 바위에 앉아 손님들이 나갈때 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다 이윽고 들어가 경철이 아버지에게 외상 쌀을 부탁해야 했던 엄마 이야기를 누나가 할 때에는 모두 한숨을 푸욱 쉬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그랜드 캐년은 정말 압권이었다. ‘장인을 찾아서’ 라는 개그 코너에서 재치 있는 입담을 뽐내던 호남출신의 개그맨이 유행시킨 말 그대로, ‘안 가봤으면 얘기를 말아~’ 야 한다. 대체 누가 발견했을까, 이 웅장하고 깊은 계곡을… 시간적인 여유가 더 있었다면 캐년 구역안의 호텔에 머무르면서 트레킹도 하며 위대한 절경을 충분히 만끽했을텐데 베가스에 예약해 놓은 쇼 시간에 맞춰 돌아와야 했다. 아쉽다기 보다는 다음을 위해 남겨논 여백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누이들은 평생 처음 해보는 카지노에 흠뻑 빠져 들었다. 아침식사 시간에도 잠깐 땡기고(?) 오겠다고 할 정도 였으나 은근히 기대했던 잭팟의 행운은 비껴간 대신 데스밸리로 향하던 길의 개스 스테이션에서 산 스크랫치 복권중 하나가 500불에 당첨돼 하늘도 난생 처음 미국에 온 누이들을 잘 대접하라는 배려를 해 주는 듯 했다.
사랑하는 나의 누이들, 건강히 오래오래들 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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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팔로알토 부동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