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바이올린 대가의 멋진 LA 복귀… 관객들에 ‘호사’

2022-05-01 (일)
크게 작게

▶ 김종하 기자의 ‘클래식 풍경’

▶ 이츠하크 펄먼… 디즈니홀 리사이틀 성황

바이올린 대가의 멋진 LA 복귀… 관객들에 ‘호사’

바이얼리니스트 이츠하크 펄먼. [LA필 제공]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 파블로 사라사테(1844–1908), 프리츠 크라이슬러(1875-1962). 다비드 오이스트라흐(1908-1974), 나탄 밀스타인(1904-1992), 야샤 하이페츠(1901-1974).

클래식 음악계에서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바이얼리니스트들을 꼽으라고 할 때 자주 떠올리는 이름들이다. 그리고 음악사에 뚜렷이 기록된 이들 바이얼린 대가들의 계보를 잇는 현존하는 최고의 바이얼리니스트를 들라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름 중 하나가 바로 이츠하크 펄먼(Itzhak Perlman)이다.

펄먼은 이스라엘의 폴란드계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4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장애를 딛고 줄리어드에 유학한 뒤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과 협연하며 레코딩 활동도 열정적이고 왕성하게 펼쳐 수많은 명반으로 그래미상들을 휩쓴 특출한 솔로이스트이자 지휘자로 잘 알려져 있다.


1945년 8월 생으로 현재 76세인 펄먼은 여전히 왕성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지난 4월24일 LA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솔로 리사이틀을 가졌다. 펄먼의 2022년 서부 투어 연주의 일환으로 잡힌 이날 리사이틀은 사실 당초 지난 2월로 예정됐었으나, 당시 오미크론 변이 대확산으로 인해 일정이 모두 연기되면서 이번에 뒤늦게 디즈니홀 무대가 성사된 것이다.

이날 피아니스트 로한 데 실바를 동반하고 특수제작된 연주용 전동카트를 탄 채 무대 위로 쏜살같이 입장한 펄먼은 1부에서 ▲헨델의 바이올린 소나타 4번 D장조 ▲모차르트의 론도 C장조, ▲브루흐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1번 G단조를 연주했다.

특유의 깊고, 따뜻하면서 매우 세련되고 풍부한 음색을 들려주는 그는 이번 리사이틀에서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현란한 기교를 아주 편하고 자연스럽게 연주하는 테크닉의 장인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펄먼은 완벽한 연주는 물론, 특유의 유머감각과 달변으로 관객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클래식계의 ‘수퍼스타’인데, 이날 디즈니홀 객석은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입추의 여지없이 꽉 들어찬 관객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연주 시작 전 잠깐 마이크를 잡은 펄먼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난 2년여 간 라이브 무대를 가질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이렇게 다시 무대에 돌아와 서니 정말 감회가 새롭다”며 “오늘 음악으로 그간의 비극과 고통과 슬픔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의미 있는 코멘트를 했다. 이어 특유의 유머를 발휘, “오늘 헨델 연주로 시작하는데, 여러분들이 이를 핸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아재개그 식의 농담으로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며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이윽고 시작된 리사이틀에서 펄먼의 헨델 소나타는 약간은 캐주얼한 연주로 유려하게, 모차르트의 론도는 경쾌하게 흘러갔고, 브루흐의 콘체르토 1번의 웅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3악장이 이날 1부 연주를 클라이맥스로 이끌었다.

이어 펼쳐진 2부는 사실 깜짝 반전이었다. 공연 프로그램에 연주곡목이 나와 있지 않고 ‘무대에서 공개될 예정’이라고만 쓰여 있었던 2부는 마치 대형 공연장이 아닌 ‘하우스 콘서트’와 같은 분위기로 생각지도 못한 즐거움과 감동을 안겨줬다.

마치 음악가 할아버지가 가족과 친지, 이웃들을 거실에 모아놓고 따뜻한 목소리로 스토리를 섞어가며 들려주는 즉흥 연주처럼, 10곡의 유명하고도 친숙한 소품들로 구성된 이날 2부는 음악이 손에 잡힐 듯 친밀한 분위기 속에 2부 전체가 하나의 긴 앵콜 공연을 방불케 했다.

2부 시작과 함께 책 대여섯 권 분량의 두툼한 악보 묶음을 피아노 페이지 터너가 들고 나타나 펄먼의 악보대와 반주자 데 실바의 피아노 위에 놓자 객석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져나왔다. 펄먼은 마치 이중에서 마음에 내키는 곡을 골라 즉흥 연주를 할 것처럼 뒤적뒤적 하더니 "이 악보들은 내가 1912년부터 LA에서 연주한 모든 곡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농을 했다. 이어 "관객들 몇 분은 1912년 공연 때도 오셨던 분들 같은데, 연주한 걸 또 하느냐고 불만 있으실 수도 있을 것"이라며 "그래도 그런 분들은 어차피 기억을 못하실테니..."라는 조크로 한바탕 웃겼다.


펄먼은 2부에서 주로 크라이슬러의 작품들, ‘푸냐니 스타일의 템포 디 미뉴에트’로 시작해 ‘마르티니 스타일의 안단티노’,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랑의 기쁨’에 이르기까지 크라이슬러의 여러 곡을, 이렇듯 특유의 해학과 유머를 섞어가며 해설을 곁들어 선사해 관객들에게 큰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줬다.

또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중 바이올린 소품 연주로 유명한, 아름답고 절절한 선율의 ‘멜로디’가 펄먼의 손끝에서 울려 퍼질 때 디즈니홀은 감미로운 음악의 향기로 가득 찼다. 이어 이탈리아의 바로크 작곡가 피에트로 도메니코 파라디스의 곡을, 펄먼 자신이 우상으로 삼았던 바이얼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가 어레인지한 작품 ‘토카다’를 통해 화려한 연주를 선보이며 현란한 기교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줬다.

2부가 말미로 향하면서 펄먼이 다음 곡에 대해 “이 곡은 어디에 가든지 나에게 연주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는 곡”이라며 존 윌리엄스가 작곡한 영화 ‘쉰들러스 리스트’ 주제곡을 소개했을 때 객석에서는 반가움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2부의 마지막 곡으로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1번을 골라 관객들로 하여금 그의 깊고 맛깔 나는 음색 가득한 연주를 듣는 기쁨을 맘껏 누리게 했다.

이렇게 리사이틀은 끝났지만, 관객들이 펄먼을 그냥 보낼 리 없었다. 펄먼과 관객들의 관계는 어느 음악평론가가 비유한 것처럼 ‘죽고 못 사는 연인’ 사이라고 했던가. 이날 디즈니홀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그가 무대를 마치는 것을 너무나 아쉬워하며 단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총 4번의 기립박수를 쳤고, 펄먼은 뜨거운 갈채 속에 다시 무대 중앙으로 나와 마지막으로 현란한 앵콜곡을 청중들에게 선사하며 열정의 밤이 막을 내렸다.

남가주의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 이날 펄먼의 리사이틀은 자주 오지 않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기회였다. 최고의 공연장 디즈니홀에서 마치 친근한 할아버지의 하우스 콘서트와 같은 멋진 연주를, 다름 아닌 펄먼과 같은 대가에게서 들을 수 있다니 이게 호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펄먼은 오는 9월13일 할리웃보울 공연을 통해 LA 관객들을 다시 한 번 만난다. ‘펄먼이 이끄는 차이코프스키’라는 주제의 9월 할리웃보울 공연은 이번 리사이틀과는 사뭇 다른 구성으로, 펄먼이 바이얼리니스트 랜덜 구스비와 함께 무대에 올라 바하의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콘체르토를 LA필과의 협연으로 들려준 뒤, 이어서 펄먼이 직접 LA필의 지휘봉을 잡고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4번을 선사할 예정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