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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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희망이 있는 4월

2022-04-28 (목) 최수잔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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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활짝 피었다. 눈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봄이, 일찍 깨어난 매화, 수선화, 개나리를 앞세우며 온 동네를 형형색색으로 밝히더니 어느새 연초록으로 물들여 놓았다.
나목에서 알몸으로 수줍게 피어나서 고귀한 자태로 하늘을 쳐다보던 하얀 목련이 올해 유독 외롭게 보이는 건 가지를 흔드는 봄바람 때문만은 아닐테고, 해마다 오만가지 풀꽃으로 들판에서 벌이는 꽃잔치가 정겹게 보이지 않는 것도 시인 엘리엇(T.S. Eliot)의 시 ‘황무지’에 나오는 ‘잔인한 달’ 이 생각났기 때문일까.
생명의 달 4월에 작고 연약한 씨앗이 만물을 소생시키기 위해서 단단한 겨울 땅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것도 잔인하지만, 러시아의 침공으로 2월말 부터 시작된 전쟁 속의 4월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무섭고 피비린내나는 폭격속에 절규하고 희생되는 우크라이나 군인들, 울부짖는 가족과 수많은 난민과 고아들의 모습에서 잔인무도한 인간의 극치가 보인다.

자유와 평화와 민주주의의 소생을 위해 얼마나 더 많은 씨앗이 희생되어야 하나? ‘황무지’에서는 삶의 의미를 잃게 만드는 외로움, 공허감이 생생히 나타나지만, 반면에 탄생 속에 죽음이 있고 그 죽음 속에 탄생이 있다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대감도 담겨있다. 5부로 된 황무지의 마지막은 샨티, 샨티, 샨티(shantih)로 끝이 난다.
평화를 기원하는 축복지향의 말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을 믿고 새 생명의 봄기운을 받아 혹독한 땅에서도 반드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와 사랑이 소생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4월의 끝자락이다. 올해의 삼분의 일이 훌쩍 가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세월이 무척 빠름을 느낀다.

시간의 흐름은 동일하겠지만 마음의 시계보다 실제 시간이 빠르니 인생 속도가 주관적으로 빠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뇌과학자에 의하면 기억은 시간의 강렬함과 기억능력의 영향을 받는데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경험은 줄고 기억능력은 감소하니 마음시계가 느려지는 건 당연하다는 것이다.
늙을수록 신경망에 퇴행이 오고 신호 처리 흐름에 저항이 심해져 이미지 처리 속도가 느려진다. 노화를 더디게 하려면 새로운 경험을 갖고 다양한 이미지를 뇌에 담아 생생한 기억을 남겨야 된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자신의 나이가 많기 때문에 무엇을 새롭게 시작하길 두려워하곤 한다. ‘미국의 샤갈’이란 칭호를 받은 폴란드 태생 유태계 이민자가 있었다. 그는 77세에 은퇴해서 노인 학교에서 체스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어떤 젊은이가 던진 충고를 듣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열심히 배우고 그려서 붓도 잡지 못했던 사람이 죽기 전까지 수많은 명작을 남기게 되었다. 해리 리버만(Harry Lieberman)의 이야기이다.
그는 “몇 년을 더 살지 생각말고 내가 여전히 일을 더 할 수 있을 지를 생각해 보라, 우리가 할 일이 있는 것, 그것이 곧 삶이다” 라고 했다. 101세가 되던 해 22번째 전시회를 열고나서야 리버만은 삶을 마쳤다.

봄안개가 아른거린다. 그 속을 가르는 새들의 지저귐이 정겹다. 긴 겨울을 인내했던 만물의 생명체에서 봄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언덕에 덮힌 희고 노랗고 붉고 보라색인 야생화들이, 하늘을 주황색으로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에 얼마나 황홀해하는지 그 아름다움에 새삼스레 가슴이 뛴다.
꿈과 희망이 영혼에 날개를 달고 있다. 삶이야 빠르게 제 길을 가겠지만, 아직은 뭔가 할 것같은 꿈이 솟는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도 더 이상 무섭고 고통스럽고 눈물어린 계절이 아닌 승리의 기쁨이 안기는 종전이 곧 될거라는 희망도 생긴다. 부활의 봄이 찾아왔다.

<최수잔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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