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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炎凉世態(염량세태)

2022-04-28 (목) 최규용 / 메릴랜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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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면 모이고 추우면 멀어지는 세상의 인심’이라는 말로서 ‘세력(勢力)이 있을 때는 달라붙고 막상 권세(權勢)가 없어지면 등을 돌리는 세속 인심(世俗人心)’을 뜻하는 말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감탄고토(甘呑苦吐), ‘정승댁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도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문상가지 않는다’라는 우리말 속담도 같은 뜻이다.
중국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에 맹상군(孟嘗君)이라는 권력가가 있었다. 그는 수많은 선비, 지사(志士)와 재사(才士)들을 식객(食客)으로 받아들여 대접했다. 맹상군의 세력을 불안해한 제나라 왕이 맹상군을 파직하고 다른 나라로 추방하자 그동안 그의 식객으로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그후 왕이 맹상군을 다시 불러들이고 복권(復權)시켜주자 떠나갔던 식객들이 하나 둘 다시 찾아들기 시작했는데 이에 맹상군이 ‘이 사람들은 무슨 염치로 내게 다시 오는가’하며 쫓으려 했다. 그때 그의 가신(家臣) 한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아침에 시장(市場)에 모이고 저녁이 되면 시장을 떠나는 이유는 아침 시장을 좋아하고 저녁 시장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저녁시간에는 물건이 다 팔리고 살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군(主君)이 권세를 잃었을 때 떠나고 권세를 되찾은 지금 다시 모여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일 뿐입니다’라고 간(諫)하자 맹상군은 이를 이해하고 결국 그들을 다시 받아들였다고 한다.

실리(實利)를 따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사람의 마음을 탓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만 다시 돌아온 식객 인사들을 포용(包容)한 맹상군의 대인배(大人輩) 다운 모습은 우리가 배울 만하다. 어떤 직책에 있다가 그만 두었을 때 늘 가까이 있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어져 허전함과 아쉬움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고사(故事)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필(名筆)로 알려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자 그를 아는 사람들 대부분은 못본 척 하였다. 그러나 그 제자 중의 한사람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은 역관(譯官)으로 북경에 갈 때 마다 귀한 책들을 구하여 스승인 그에게 보내주었다.


추사는 이에 대한 답례로 그에게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을 그려 보내주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라는 공자의 논어(論語) 말씀을 인용하며 ‘송백(松柏)은 사철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데 세한(歲寒)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이다.
성인(聖人)이 특히 세한의 후에 그 것을 칭찬하였던 바, 지금 그대는 나에게 전(前)에도 더함이 없었고, 후(後)에도 덜함이 없구나’라며 그의 의리와 인품을 칭찬하였다.

이상적은 이 세한도를 중국에 갈 때 가져가 북경의 명사(名士)들에게 자랑하며 보여주었는데 세한도에 감탄한 명사들과 후세의 사람들이 추가로 찬사(讚辭)를 써넣다 보니 가로 족자의 길이가 무려 14미터에 달하게 되었다. 세한도는 현재 국보 180호로 지정되었고 염량세태(炎凉世態)의 인정(人情)을 거스른 제자 이상적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의리는 세한도와 함께 세세대대로 후대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최규용 / 메릴랜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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