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기울고 빛이 순해지는 초저녁이 되면, 마을 호숫가의 숲은 더 깊고 더 먼 데까지 보입니다.’
선생님, 오늘 전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을 들으며 말라르메의 목가를 읽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한 것은 일전에 기억했던 바르트의 당부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라르메보다는 역시 발레리에게 더 열광적인 찬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발레리는 저의 내면에서 별과 같이 아주 시적이고, 새롭고,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편지를 다시 보았습니다. 오래된 편지를 꺼내 보는 일은, 추억의 옛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정감이 있습니다. 특유의 호방한 자체(字體)에서 묻어나는 친근함과, 편지에 담긴 크고 작은 기억들이 생생이 떠오릅니다. 편지에는 어떤 편리한 대체제도 담아내지 못하는 아련함과 애틋함이 그리 스며 있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며 잘 지내고 있을 것을 믿어’’ ‘‘열심히 글 쓰고 있지, 믿는다.’’ 여리고 흔들리는 마음에 늘 신뢰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선생님, 그런 선생님께 다가왔던 어떤 하루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평소 존경하시던 이어령 선생님의 부고를 받은 날이었습니다.
“다리가 휘청거렸어” “나도 마음이 힘들었지만, 형심이가 통곡하다시피 우는데 어쩔 도리가 있어야지... 미루지 말고 안부 여쭈라고 했지? 하다가 그저 달래 주었어. 나라고 마음이 괜찮았겠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헛헛해. 그래서 나도 정은이에게 위로 받고 싶어 전화 한 거야.” ‘북가주 한인 사회의 문학적 대모’이자 ‘예인 등대의 불빛’으로 우리에게 뒤로 물러남이 없는 힘찬 물줄기가 되어 주시는 분, 그날 저는 지난 25년 동안 선생님께 한번도 들어본 적 없던 문구를 듣게 되었습니다. “다리가 휘청거렸어.”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일은 늘 어렵기만 합니다. 그리고 배웁니다. “사랑은 주는 자의 몫이 다 끝난 뒤에, 받는 자의 깨달음이 뒤늦게 뛰어온다는 것을.” 그래서 내리사랑이라고 하는 걸까요. 받는 자는 여전히 철이 없고 뒤늦은 깨달음은 반복될 테지만, 여리고 순하고 뜻한 것들이 살랑이는 봄, 오늘 이 봄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제 슬픔 거두시고 햇빛이 숭고하게 쏟아지는 길을 함께 걸어요, 우리 마주보며 웃을 수 있게. 그 웃음이 내겐 행복이 될 수 있기에...
지금껏 모자란 글을 잘 읽어 주신 모든 분들과, 영원한 사랑이신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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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은(SF 한문협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