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개발계획을 알리는 안내판을 맞닥뜨렸다. ‘몇 년 후면 여기도 커다란 건물이 들어서겠구나.’
돌아서려는 찰나, 도시 슬로건이 눈에 확 띈다. 산호세, 실리콘밸리의 수도(San Jose, Capital of Silicon Valley). 우리가 흔히 실리콘밸리로 인식하는 지역은 샌프란시스코만을 둘러싼 베이에어리어(Bay Area)다. 베이에어리어에서 가장 큰 도시가 산호세다. 통계에 따르면 산호세에는 103만 명 이상이 산다. 인구수 기준 미국 10대 도시에 들어간다. 산호세가 1988년부터 ‘실리콘밸리의 수도’를 자처하는 까닭이다.
초창기 실리콘밸리는 산타클라라 밸리를 가리키는 좁은 개념으로 출발했다. 시간이 흐르고 집적효과가 커지면서 지금은 일반적으로 샌프란시스코만을 둘러싼 지역 전체를 일컫는다. 미국 노동부에서 발표하는 ‘계간 고용임금 통계’에 따르면 실리콘밸리는 베이에어리어의 6개 카운티를 포함한다. 산타클라라, 산마테오, 샌프란시스코, 알라메다, 산타크루즈, 콘트라코스타 카운티가 여기에 해당된다.
살구나무, 자두나무로 가득했던 베이에어리어의 과수원 지대는 어떻게 몇십 년 만에 세계 혁신을 이끄는 중심으로 우뚝 섰을까? 혁신의 중심은 왜 미국이며, 미국에서도 서부이며, 서부에서도 캘리포니아이며, 캘리포니아에서도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일까? 법규상 이점, 지식집약 환경, 수준높은 노동력, 실력 중심의 사회, 실패를 용인하는 풍토, 개방성, 산학협력, 높은 삶의 질, 비즈니스 인프라 등 실리콘밸리 생태계(habitat)를 이루는 수많은 요인이 있다. 이에 비해 실리콘밸리 탄생의 정신·문화적 배경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실리콘밸리의 기원을 다룬 책 ‘생각을 빼앗긴 세계’의 저자 프랭클린 포어는 이렇게 말한다. “혁신은 마술처럼 갑자기 나타나거나 단순히 과학적 논리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며, 문화가 혁신을 낳는다”고 말이다. 실리콘밸리 탄생에는 분명 일련의 문화적 흐름이 존재한다. 스탠퍼드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 교수인 프레드 터너(Fred Turner)는 저서 ‘반문화에서 사이버 문화로’에서 실리콘밸리 문화의 근원을 되짚어 올라간다.
터너에 따르면 1950년대 저항운동의 중심이자 1960-70년대 반문화 조류를 이끈 공간이 혁신의 아이콘 실리콘밸리로 변모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에는 오랜 세월 새로운 세계를 꿈꾼 청년들의 강한 열망이 축적돼 있다. 새로운 세상을 실험하기 위해 많은 히피들이 자연에서 공동체를 만들었지만 일부는 테크놀로지에서 미래를 보았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엉뚱하고 허무맹랑한 사람들이 혁신의 중심이자 기술혁명의 주인공이었다. 출발점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상상력이다.
저녁 퇴근길, 사무실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30분이 걸린다. 가까운 거리지만 ‘실리콘밸리의 수도’ 산호세에서 산타클라라의 경계를 지나야 한다. 걸으면서 마주한 산타클라라 시의 슬로건은 ‘가능한 것의 중심(The Center of What’s Possible)’이었다. 산호세가 지역적 개념의 실리콘밸리를 내세운다면산타클라라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실리콘밸리의 무형적 공기(atmosphere)에 주목한다. 이처럼 실리콘밸리를 지리적 경계를 뛰어넘어 하나의 사고방식(mindset)이자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혁신가들이 모여드는 한 세계 어느 곳이든 새로이 실리콘밸리가 형성될 수 있다는 뜻일 테다.
안주하지 않는 혁신가의 자세는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끊임없이 답을 구해야 할 거대한 과제를 마주하고 세상을 뒤흔든 혁신가의 다짐을 엿본다. 실리콘밸리가 표상하는 기술과 문화의 융합을 가장 잘 구현한 인물은 여전히 스티브 잡스다. 잡스가 죽음을 앞두고 남긴 문장이 새로운 울림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능을 사용해 깊은 감정을 표현하고 이전 시대에 이뤄진 모든 기여에 고마움을 표현하고 그 흐름에 무언가를 추가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나를 이끌어준 원동력이다”
=====
신우교씨 마지막 문장은 원문대로 이탤릭체로 해주세요
<
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