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치열했던 이민의 삶 그리고 노년

2022-04-08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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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다. 삶의 여건이 너무 어려울 때, 감당해야 할 노동의 무게가 너무 무거울 때 … 우리는 이 말을 되뇌며 버티곤 했다. ‘사서도 한다’는 ‘젊어 고생’의 대표주자로 이민자를 꼽을 수 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낯설고 물선 땅에 와서 손짓 발짓하며 주 7일 하루 10여 시간씩 일하던 것이 한인이민 1세대의 보편적 삶이었다. 그런 고생을 감수하며 얻으려 했던 것은 자녀들을 위한 양질의 교육 그리고 경제적 풍요로움. 자녀들 명문대학 보내고, 벤츠 타고, 넓은 집 장만하면 아메리칸 드림 완성으로 여겼다. 미국이민 물꼬가 트인 1968년부터 한인이민 1세들의 모습이 대체로 이러했다.

그리고 그 젊었던 시절, 가족여행 한번 못가고 일에 파묻혀 살면서 막연히, 하지만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있었다. 안락한 노년의 삶이다. 잘 자라 성공한 자녀들 결혼 시키고, 주말이면 아들가족 딸가족 모두 모여 식사를 하고, 일년에 두어 차례 고국을 방문하거나 해외여행을 하며 부부가 행복하게 늙어갈 것으로 기대했다. 그 세대가 노년이 된 지금, 그들의 삶은 만족스러운가. 그렇지 못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최근 미국가정의학회 저널에는 미국내 아시아계 노인들의 삶 만족도 연구보고서가 실렸다. UCLA 연구진이 2018년 가주 보건인터뷰조사 데이터를 토대로 65세 이상 아시안(한국, 중국, 필리핀, 베트남계) 8,200명의 표본을 추출해 분석한 내용이다. 그 결과를 보면 아시안 노인들의 삶 만족도는 다른 인종들에 비해 낮고, 그중에서도 한인들의 만족도가 낮다. 다른 인종 노인들은 평균 80%가 삶에 만족한다고 답한데 비해 아시안 노인들은 54%, 한인들은 40%만이 만족한다고 답했다. 한인노인 10명 중 6명은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말이다.


LA에 사는 80대 남성의 근황을 우연히 들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70년대에 이민온 그는 전형적인 한인이민 1세의 삶을 살았다. 막일부터 시작해 악착같이 돈을 모아 리커스토어나 세탁소 등 사업체를 마련하고 밤낮없이 일해 부를 일군 케이스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삶은 편안치 못하다. 이혼해 혼자 살고 있고 건강도 좋지 않다. 성인자녀들은 어머니와 가깝게 지낼 뿐 아버지와는 뜨악하다. 이렇게 적막하고 서글픈 노년을 맞으려고 수십년 그 고생을 했나 싶은 회한이 절로 드는 상황이다.

그는 가장으로서 가족들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싶어 몸도 돌보지 않고 일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일터에 있었으니 자녀들은 아버지와 대화는커녕 얼굴 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자녀들은 점점 미국 아이로 자라나고, 권위적 한국 아버지와의 문화적 정서적 간극은 커지고, 얼굴만 보면 (‘다 너 잘 되라고’) 지적하고 야단치는 아버지에게 반발하고,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무시당한 느낌에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고, 아이들 감싸는 아내에게 폭언을 하고 … 이민1세 가정에서 흔하게 일어났던 일들이다. 돈을 버는 대가로 가족과의 관계를 희생하는 삶이었다. 그렇게 틀어진 관계가 끝내 회복되지 못하면 노년은 외롭다.

삶 만족을 좌우하는 변수로 보통 소득, 건강, 관계의 질, 사회적 지위 등이 꼽힌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심신이 건강하며 가족친지들과 사이가 좋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지위에 있으면 삶 만족도는 높아진다. 한편 노년층은 젊은 층에 비해 돈과 지위에 가치를 덜 두는 대신 가족과의 관계 그리고 일생의 성취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지난 삶을 돌아보며 ‘이만하면 잘 살았다’ 싶은 느낌이 삶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삶에 대한 만족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이다. 가진 것 별로 없고 건강도 좋지 않은 사람이 돈 많고 건강한 사람보다 삶 만족도가 높을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 삶과 현재의 삶이 얼마나 다르고 무엇이 다른가가 만족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나이 들수록 필요한 것은 물질적 부가 아니라 정신적 부(Psychological Wealth)다. 인생 희로애락에서 의미를 찾는 성숙함, 새롭고 흥미로운 활동들에 적극 참여하는 싱그러운 자세, 중요한 목표를 설정하고 추구하는 도전정신, 매 순간 긍정적 감정들을 경험하는 풍성한 감성, 보다 큰 존재와 튼튼히 연결되는 영적경험들이다. 정신의 부자가 삶 만족도가 높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노년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해도 방법은 있다. 삶 만족도와 행복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노인들의 삶 만족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지혜’를 꼽는다. 산전수전 겪으며 쌓은 내공이다. 나에게 집중되었던 눈에 남이 들어오고, 내 아픔만 느껴지던 가슴에 남의 아픔이 느껴지며, 모든 존재가 귀하게 여겨져 사랑으로 대하게 되는 마음가짐 그리고 통찰력이다. 그렇게 깊고 넓게 열린 자세로 인생을 마주하면 삶이 만족스럽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일밖에 모르고 달려온 이민 1세들이 생의 결승점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제는 숨 돌리고 인생이라는 산을 찬찬히 둘러보기 바란다. 서있는 위치에 따라 풍경은 달라진다. 노년의 언덕에서 이제껏 못 본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기를, 경험하기를 바란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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