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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 오닐의 새로운 길‘타카치 쿼텟’

2022-03-23 (수)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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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굴지의 현악사중주단 ‘타카치 쿼텟’(Takacs Quartet)의 연주회가 지난 주말 샌타모니카의 브로드 스테이지에서 있었다.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새 멤버로 조인한 실내악단이다. 2년반 만에 남가주 무대에 선 용재의 비올라 소리를 들으니 그를 지켜보아온 지난 시간들이 마음속에 스치듯 흘러갔다.

용재 오닐을 처음 만난 것은 2010년, 영혼을 어루만지는 깊은 연주와 그의 성실성, 겸손함에 매료돼 팬이 되었다. 실내악앙상블 ‘카메라타 퍼시피카’의 수석 비올리스트였고, 뉴욕의 영예로운 ‘링컨센터 체임버뮤직 소사이어티’의 주전멤버였으며, 한국서는 꽃미남 클래식그룹 ‘디토’의 음악감독이었던 그를 그때이후 틈만 나면 인터뷰했고 수많은 기사를 썼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카메라타 퍼시피카’의 콘서트 무대에서 만났다.

서른한 살이던 그는 지금 마흔셋이 되었다. 연주자로서 청년에서 중년으로 성숙해가는 동안 끊임없이 음악적 도전을 감행해온 용재 오닐은 그래미상에 세 번 후보 지명되어 2021년 ‘베스트 클래식 기악 독주’ 부문상을 수상했다. 수상 음반은 크리스토퍼 테오파니디스의 ‘비올라와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데이빗 알란 밀러 지휘의 올바니 심포니와 협연)으로, 비올라 연주자가 기악독주 부문상을 탄 것은 드문 일이라 화제가 됐었다.


그는 또 2013년 ‘안녕?! 오케스트라’로 국제에미상을 수상했다. 이 감동적인 4부작 다큐멘터리는 용재선생님이 11개국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꿈을 심어준 ‘기적의 1년’을 기록한 작품으로, 한국 최초로 국제에미상 ‘아츠 프로그래밍’ 부문에서 수상했다.

그렇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동안에도 그는 집이 있는 LA에 왔을 때 가장 편안해보였다. 그런 그의 연주를 일년에 몇 번씩 ‘카메라타 퍼시피카’ 무대에서 직접 듣는 즐거움은 지난 세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권이었다. ‘카메라타’는 그동안 용재 오닐을 위한 신작을 3곡이나 위촉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는데 후앙 루오 작곡의 ‘잊혀진 책’(2010)과 비올라협주곡 ‘인 아더 워즈’(2012), 레라 아우어바흐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24 프렐류드’(2018)의 세계초연을 모두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던 행운을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서울, LA, 뉴욕를 오가며 종횡무진했던 지난 15년은 그가 “미쳤다”고 표현했으리만치 화려하고 역동적인 시간이었다. 수많은 음악프로젝트를 벌이는 동안 솔로음반도 10장이나 냈으니 “평생의 음악인생을 다 산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풍요로운 경험을 했고, 깊고 방대한 레퍼토리를 소화했으며, 수많은 명연주자들과 연주하고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기였다”고 그는 회상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음악을 가까이서 들을 기회는 전처럼 많지 않을 것이다. 2019년 ‘디토’의 12년 여정을 마무리한 용재는 2020년 ‘카메라타’와 ‘체임버뮤직 소사이어티’를 떠나 세계최고 현악사중주단의 하나인 ‘타카치 쿼텟’에 합류했다. 뮤지션 인생의 새로운 챕터에 들어선 셈으로, 활동무대가 북미와 유럽 전역으로 확대된 것이다.

“타카치 사중주단의 바르톡 음반과 연주를 어릴 때부터 즐겨 들었다”는 용재는 “중부유럽 특유의 내밀한 사운드를 간직한 이 특별한 쿼텟의 멤버가 된 것은 현악연주자로서 꿈이 실현된 것”이라고 전했다. 1975년 헝가리 출신 연주자들이 창단한 타카치 쿼텟은 1983년 미국으로 기반을 옮겨 현재 콜로라도 대학의 ‘레지던스 인 쿼텟’ 패컬티로도 활약하고 있다.

2년전 콜로라도 보울더로 이주한 용재는 최근 이메일을 통해 작년 3월 이곳 수퍼마켓에서 일어났던, 경찰관 포함 10명이 사망한 총기난사사건을 간발의 차로 피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애틀 친구들에게 마스크를 부쳐주러 ‘킹 수퍼스’ 마켓에 갔었던 그는 “총격범이 들이닥치기 불과 10분전에 현장을 떠났다”면서 “조금만 지체했더라도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아찔했던 순간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며칠 후 숨진 경관의 장례식에서 연주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감정적으로 무척 힘든 연주였다고 술회했다.

팬데믹 기간에도 타카치 쿼텟과 함께 2장의 음반을 녹음 발매했고, 한국서도 여러 차례 연주했다는 용재는 2020년 현충일에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천안함 희생자들을 위한 공연을 가졌던 것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타카치 쿼텟의 지난 19일 브로드 스테이지 데뷔공연은 특별한 프로그램이었다. 반도네온 연주자 줄리앙 라브로를 중심으로 짜여진 레퍼토리여서 좀 아쉬웠지만, 모리스 라벨의 쿼텟에서 보여준 제1과 제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조화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네 사람의 합이 얼마나 기막히던지, 서로를 온전히 믿고 존중하는 유대감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친밀한 사운드가 연주 홀을 가득 채웠다. 이들은 앞으로 매년 브로드 스테이지에 찾아올 것이라고 한다. 2018/19시즌에 이 공연장의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였던 용재가 다리를 놓은 듯하다.

클래식 음악이 좋은 건 연주자와 청중이 함께 나이 먹어가며 성숙한다는 것이다. 용재가 성장하고 변화하는 동안 나의 음악세계 역시 달라지고 진화했다. 이제 유명 쿼텟의 단원이라는 새로운 길을 걸어가며 한층 더 깊은 연주자로 성숙해가는 그의 모습을 또 다른 기대와 기쁨으로 지켜볼 것이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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