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18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선다. 일어난 시각은 새벽 5시 남짓이었지만 대문을 열었을 때는 오전 7시가 다 됐다. 배낭을 꾸리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실리콘밸리에서 생활한 지 1년, 걸어서 베이에어리어를 일주하기로 마음 먹었다. 100마일이니까 얼추 일주일이면 충분할 것이다. 일주일 여정을 소화하는 데 꼭 가져갈 물품을 추려내기가 쉽지 않다.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몸만 가고 싶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어느새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다. 마흔을 불혹이라고 했던가? 미혹됨이 없어야 하는 나이가 다가오고 있지만 살아온 세월이 그리 단단하지는 않아 보인다. 감당할 듯 감당하지 못할 듯 아리송한 무게의 배낭 지퍼를 닫는다. 새로운 세상으로 발을 내디딜 시간이다.
237번 도로 옆길을 따라 걷다가 밀피타스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샌프란시스코만 둘레길(Bay Trail)을 타면서 커다란 건물을 맞닥뜨렸다. 아마존 물류창고였다. 아마존에서 물건을 처음 샀던 때를 2007년으로 기억한다. 그러고 보니 벌써 15년 전이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시간은 언제나 빠르다.
미국에 와서 당시 무엇을 샀는지 확인하고 싶어 로그인을 해보지만 당시 가입한 이메일 계정은 사라졌다. 오기가 생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마존닷컴에 전화를 한다. “지금 내 사정이 이러이러한데, 구매목록이 남아 있을까?” “그래? 확인해줄게.”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니 상담원이 의아한 반응을 보인다. “2007년에 가입한 계정은 있는데 구매목록은 없네?” 그러면서 덧붙이는 한마디가 불씨를 살린다. “아마존닷컴 맞아? 아니면 해당국가에 있는 아마존에서 확인해야 돼.”
아뿔싸! 15년 전 처음 가입한 아마존 사이트는 아마존UK였다. “미안한데 영국에 있는 아마존 서비스센터 번호 좀 알려줄래?” “응, 잠시만.” 바다를 건너 신호음이 닿자 아마존UK에서는 몇 가지 개인정보를 확인한다. 최근 배송지가 어디냐는 질문에 15년 전 머물던 영국 중동부 소도시의 기숙사 주소까지 뒤져야 했다. 담당자는 꼼꼼하게 우편번호까지 확인한다. 미국에서는 ZIP Code를 물어보더니 영국에서는 Postal Code를 불러달라고 묻는다. 작지만 흥미로운 표현의 차이다. 우편번호 관문까지 통과하자 이메일로 구매목록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어렵사리 받은 메일에는 구매정보 4건이 들어있었다. 2007년, 사전을 두 권 샀고 어학교재를 한 권 샀으며 나머지 하나는 스페인 산티아고길 순례 가이드북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취직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어쩐지 아마존에서 뭔가를 살 기회가 없었다. 인터넷서점으로나마 존재하던 아마존과도 차츰 인연이 멀어졌다.
15년이 지나 미국 근무를 시작하고 매일 아마존 배송차량을 본다. 무엇이 지금의 아마존을 만들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이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창업자의 철학을 훔쳐보는 것이다. 제프 베이조스의 책 <발명과 방황(Invent & Wander)>에서 그는 ‘데이원(Day 1)’ 정신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20여년 전 닷컴버블 때 아마존은 거품이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했다. 베조스는 “우리는 매일 인터넷 시대의 첫날에 살고 있다”고 담담히 답변한다.
승자가 역사를 쓰는 것처럼 아마존이 시장에서 승리했기에 그의 ‘첫날’ 정신이 빛을 발하는 건지도 모른다. 결과를 놓고 돌이켜보면 베이조스에게는 크고 분명한 새 시대의 ‘첫날’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에게 ‘둘째 날’은 정체(stasis)이자 무관함(irrelevance)이며 극심하고 고통스러운 쇠퇴(decline)를 의미한다. 베이조스는 덧붙인다. “그 다음 남은 것은 죽음(death) 뿐입니다. 따라서 항상 첫날이어야 하지요”
베이조스의 ‘데이원’ 철학을 접하고 고사성어 ‘일신우일신’이 떠올랐다.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라”는 의미가 아마존의 ‘첫날’ 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학교 다닐 때 배운 내용이지만 누구에게는 진부한 상식이 되었고 누구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내다 본 기업가정신이 되었다. 늦었지만 어찌 하랴. 오늘이 여생의 첫날이라는 다짐으로 지금, 여기에서 마음가짐을 새로이 할 뿐이다. 아직 걸어갈 길이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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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