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1861~1865) 당시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었다면 미국의 운명은 바뀌었을까? 에이브러햄 링컨 같이 탁월한 리더가 없었다면 합중국이 남과 북으로 갈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 미국 역사학자들이 이따금 제기하는 의문이다. 링컨은 그만큼 훌륭한 지도자였다는 말이다.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미국 역사상 그 어떤 대통령도 그만큼 큰 위기에 봉착했던 적은 없다. 어떤 대통령도 그만큼 큰 업적을 이룬 적은 없다.” 링컨의 강력한 리더십 덕분에 합중국이 보전돼 오늘의 초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평가이다. 어떤 결정적인 시점에 어떤 리더십이 발휘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은 바뀔 수 있다.
말 많고 탈 많았던 대한민국의 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외신들이 줄줄이 ‘정치판 오징어게임’이라고 보도할 만큼 상호비방과 흑색선전이 극에 달했던 시끄럽고 역겨운 싸움은 이제 끝났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대통령 당선인으로 확정되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최선을 다했지만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며 20여만 표 초박빙으로 갈린 결과에 승복했다. 우려되었던 대선결과 불복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한바탕의 싸움 후 남은 것은 상처. 양 후보 진영의 극렬한 대립으로 깊어지고 벌어진 범사회적 상호증오의 상처이다. 대선결과를 놓고 국민의 절반은 ‘정권교체 성공’이라고 환호하고, 다른 절반은 ‘대한민국의 퇴보’라고 탄식한다. 환호와 탄식으로 갈라진 극한 분열 속에서 아프지 않을 국민은 없다. 이 깊은 상처를 당선인은 어떻게 봉합하며 국민을 통합해갈 것인가.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1860년 11월 미국사회는 혼란스러웠다. 노예해방론자들, 노예제 지지자들, 북부의 합중국 지지자들, 남부의 연맹 지지자들, 남과 북의 온건파들 등 사회가 사분오열되었다. 노예제 폐지를 내세우는 공화당의 링컨이 대통령이 되자 남부 주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듬해 3월 링컨이 취임하기 직전 남부의 5개주가 합중국에서 탈퇴했다. 그리고는 대통령 취임 한달 후인 4월 12일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대혼란의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한 것은 링컨의 리더십이었다. 그는 타고난 리더였다. 확고한 신념으로 통솔하고, 탁월한 연설로 국민들과 소통하며, 적극적으로 협상했다. 여기에 더해진 것이 ‘사람’이었다. 통 큰 용인술이다. 필요한 인재라면 정치적 적이든 친구든 가리지 않고 ‘내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구성된 막강한 내각은 전쟁 중 힘을 발휘하며 링컨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대표적 인물이 윌리엄 수어드이다. 연방상원의원, 뉴욕 주지사 등을 거친 그는 나이, 경력, 지명도 어느 면으로 보나 링컨에게는 족탈불급이었다. 1860년 대선에서 수어드는 자타가 공인하는 공화당후보 1순위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링컨이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했다. 수어드는 엄청 충격을 받았다. 신출내기에게 패했으니 자존심이 대단히 상했을 것이었다. 두어달 동안 그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침묵 속에 지냈다.
그런 그에게 링컨은 국무장관직을 제안했다. 대선 한달 후인 12월 초 링컨은 수어드에게 두통의 편지를 보냈다. 장관직 제안 공식서한과 사신 한통이었다. “내가 그냥 격식 상 제안하는 거라고 신문들이 보도했지만 그 말 믿지 말라. 내 생각에 당신은 그 직의 최고적임자이고 이 나라가 당신을 필요로 한다”고 링컨은 진솔하게 썼다. 수어드는 마음을 열었다.
이후 그는 링컨을 존경하게 되었고, 링컨이 가장 신뢰하는 충직한 각료를 넘어 절친 단짝이 되었다. 1865년 링컨 암살모의에 그도 타깃이 되어 중상을 입었을 정도였다.
국무장관으로서 수어드의 가장 큰 공적은 남북전쟁 중 유럽 국가들의 전쟁개입을 막아낸 것이었다. 외교력을 발휘해 유럽이 남부연맹을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도록 했다. 만약 유럽이 남부연맹을 무력 지원했다면 미국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알 수가 없다. 수어드의 또 다른 공적은 알래스카 매입. 러시아로부터 헐값에 동토를 사들인 후 그는 ‘수어드의 미친 짓’ ‘수어드의 아이스박스’라며 당시 온갖 조롱을 당했었다.
링컨은 당내 경선 주자들은 물론 민주당 출신까지 내각에 포진시키며 그들로부터 최고의 역량을 끌어냈다. 전쟁 중 재정을 책임졌던 새몬 체이스 재무장관, 전쟁을 총괄했던 에드윈 스탠턴 전쟁장관 등이다. 하나같이 링컨 비판에 둘째가라면 서러웠을 인물들이었다.
그런 사심 없는 통합의 정치로 링컨이 이루려던 나라는 ‘국민의 나라’였다. 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11월 19일 링컨은 격전지였던 게티스버그(국립묘지)를 찾았다. 전쟁에 가족을 잃고 참담한 주민들 앞에서 그는 남북전쟁이 1776년 세워진 미합중국의 존속 여부에 대한 궁극적 시험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결단코 사라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대한민국이 새로운 미래를 앞두고 있다. 대통령 당선인 앞에 5년의 세상이 놓여있다. 그 세상에 그는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 국민이 상처받지 않고 함께 잘 살아가는 나라여야 할 것이다. 멀리 내다보고, 높이 바라보며, 넓게 포용하는 리더십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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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