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공연예술계에도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러시아 출신의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서구의 공연단체들로부터 푸틴과 전쟁에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받으면서 하루아침에 공연 스케줄에서 배제되고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푸틴과 친분이 깊은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다.
게르기예프는 3월1일자로 독일 뮌헨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에서 해고됐고, 이번 달 이탈리아 라 스칼라극장에서의 오페라 지휘가 취소됐으며, 네덜란드의 로테르담필하모닉과 영국의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 스위스의 베르비에 페스티벌이 모두 그와의 계약을 취소했다. 이 공연기관들은 게르기예프에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천명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전했다.
게르기예프는 지난달 말 3일간 뉴욕 카네기홀에서 빈 필하모닉을 지휘할 예정이었는데 이 또한 전격 취소됐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을 협연하려던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도 푸틴 지지자여서 함께 취소됐다. 바로 연주 전날 이런 일이 벌어지면서 긴급 교체된 지휘자는 야니크 네제 세갱, 협연자는 조성진이었다.
놀랍게도 조성진은 전날 저녁에 연주 요청을 받았고, 곧바로 베를린에서 7시간 걸려 날아와 공연시작 75분전에 한 번도 협연해본 적이 없는 빈필과 리허설을 가졌다고 한다. 2019년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이 대작을 완전 암보로 공연한 조성진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이처럼 부담스러운 상황을 감안한다면 기적적일만큼 훌륭한 연주”였다고 평하고 “감정이나 기교를 쏟아 붓기보다 지고의 섬세함을 보여준 연주”라며 원래 예정됐던 마추예프보다 더 나은 것 같다고 격찬했다. 조성진은 이 연주로 뉴욕음악계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한편 지난 20여년간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의 최고 스타였던 안나 네트렙코 역시 푸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는 메트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올봄 푸치니의 ‘투란도트’와 다음시즌 베르디의 ‘돈 카를로’에서 배제됐다. 네트렙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 가수의 한사람이다. 아무리 높은 음역도, 아무리 어려운 벨칸토 창법도, 비단처럼 부드럽고 매끄럽게 노래하면서 최고의 연기를 펼치는 그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들 외에도 많은 ‘캔슬’이 있었다. 모스크바 볼쇼이극장과 프랑스의 툴루즈 국립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투간 소키예프는 지난 6일 두 곳의 음악감독 직을 모두 자진 사임했다. 프랑스 측으로부터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그는 “음악을 할 때 우리는 국적을 생각하지 않는다”며 “뮤지션들은 평화의 사도”라고 유감을 토로했다. 폴란드 국립오페라는 최근 러시아 작곡가 무소로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공연을 취소했고, 영국은 시베리아 러시아국립발레단과 오페라의 공연을 캔슬했다.
영화계에서도 비슷한 조치가 잇달고 있다. 칸 국제영화제는 오는 5월 영화제에 러시아의 대표단을 초청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베니스 영화제도 러시아 정부와 연관된 사람은 어떤 행사에서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토론토 국제영화제는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받는 기관이나 대표단의 참가를 불허했고,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영화제는 러시안 감독 키릴 소콜로프와 라도 크바타니야의 작품 상영을 취소했다. 이 두 사람은 전쟁과 푸틴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지만 영화가 러시아 국립기금을 받아 제작됐다는 이유로 배제됐다.
정치적 이유로 예술이 배척당한 사례는 적지 않다. 전설적인 지휘자 푸르트 뱅글러는 1936년에 뉴욕 필하모닉, 1948년 시카고심포니의 지휘자로 초빙됐으나 나치 시절 부역했다는 이유로 미국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무산됐다. 1958년 남아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는 공연과 전시 보이콧이 일어나 20여년간 이어졌고, 작년 5월에는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음악인 600여명이 이스라엘에서의 공연을 거부하기도 했다.
예술과 정치의 분리는 오랜 논쟁거리다. 어떤 예술도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예술이라도 작품에 정치관이 적극 표현되는 미술과 문학과는 달리, 클래식음악은 연주자의 신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지 않는다. 반유대주의자이며 전체주의자였던 바그너의 음악과 민족주의자였던 베르디와 시벨리우스의 음악이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 연주되는 이유다.
게르기예프와 마추예프는 2017년 디즈니홀에서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함께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을 연주했었다. 그때 공연을 들으면서 러시아 음악을 이처럼 파워풀하게 연주하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21세기 문명시대에 야만의 전쟁을 벌인 푸틴은 역사의 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그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세계 최고수준의 음악인들까지 대가를 치러야한다면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또 다른 캐주얼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