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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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 우크라이나, 그리고 한반도

2022-03-08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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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면서 미국이 갖고 있던 초미의 관심사는 구 소련 연방 공화국 곳곳에 흩어져 있던 핵 무기의 행방이었다. 이들이 독립된 국가가 되고 이들간에 무력 충돌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핵 전쟁으로 번지지 말란 법도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1994년의 ‘부다페스트 각서’ (Budapest Memorandum)다. 여기서 구 소련의 일부였던 벨라루스와 카자흐스탄,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가지고 있던 핵 무기를 폐기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우크라이나가 갖고 있던 핵 탄두는 1,900기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며 미국과 러시아 모두 이를 없애기 위해 온갖 압박을 가했고 일부 우크라이나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는 이를 결국 수용했다. 이 각서를 통해 우크라이나는 핵 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핵 폐기에 들어가는 비용 전액 보상과 경제적 지원은 물론 어떤 나라도 영토를 무력으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약속(assurance)을 받았다.

우크라이나와 대조적인 나라가 있다. 이스라엘이다. 1948년 건국하자마자 이스라엘이 총력을 기울인 사업의 하나가 핵 무기 개발이다. 그 결과 60년대 후반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6번째로 이에 성공했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80에서 400기의 핵 무기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이스라엘 정부가 그 존재를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는 ‘전략적 모호’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기밀 누설은 중죄로 다스려진다. 1986년 핵 개발 센터에서 일했던 모르드게 바누누라는 기술자가 실상을 폭로했다 이스라엘 정보부인 모사드에 의해 납치돼 압송된 후 반역죄로 기소돼 1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스라엘은 또 자기는 핵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웃 나라가 핵을 보유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이라크와 시리아가 핵을 개발하려 하자 1981년과 2007년 선제 타격으로 원자로를 파괴했고 2010년에는 컴퓨터 바이러스로 이란 핵 개발 작업을 교란했다. 이로 인해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국가의 생존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민중의 영웅적 항쟁으로 러시아의 침략이 시작된 지 1주일이 넘었지만 푸틴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로 그가 순순히 물러날 것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그가 수많은 러시아 병사들의 목숨을 희생하고도 빈 손으로 나온다면 망신을 넘어 정치적 입지가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부다페스트 각서’를 내세우며 러시아의 제공권이라도 막아달라고 호소하고 있지만 미국과 유럽은 부다페스트에서 맺은 것은 ‘협정’(agreement)이 아니고 ‘각서’며 우크라이나 영토 보전도 ‘보장’(guarantee)이 아니라 ‘약속’이라며 직접 참전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이는 결국 말장난이고 핵을 가진 러시아와 직접 붙었다가 핵 전쟁이 일어나는 위험은 피하고 싶다는 게 솔직한 이유일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은 28년 전 핵 무기를 포기한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푸틴이라도 모스크바가 초토화되는 것을 각오하고 1,900기의 핵 탄두로 무장한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돌아봐야 할 것이 한반도의 상황이다. 북한의 김정은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이전에 핵무기를 포기할 생각이 손톱의 때만큼이라도 있었다면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이미 핵을 포기한 이라크의 후세인이나 리비아 가다피의 운명을 목격한데다 지금 우크라이나가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강대국의 약속을 믿고 핵을 순순히 내놓는다는 것은 제 정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김정은은 그렇다 치고 대한민국은 어떤가. 현재 한국의 운명은 전적으로 미국의 약속 한 마디에 달려 있다. 미국의 핵 우산이 걷히는 날 한국은 북한 핵에 그대로 노출되고 북한이 하자는대로 끌려다니는 속국이 될 수밖에 없다. 서울 한 복판에 핵 폭탄이 떨어진다는데 누가 감히 김정은 말에 토를 달겠는가.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태가 보여주듯 강대국과의 약속은 상대방이 그걸 지키는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할 때까지만 유효하다. 북한 핵 탄두가 워싱턴과 뉴욕을 타격할 것이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을 지켜주리란 보장은 없다. 현명한 한국 국민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여론 조사를 해보면 항상 70% 이상이 독자적 핵 보유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미국의 압박을 핑계로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는 일을 한국이라고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핵 확산 방지는 원칙적으로는 옳지만 한국과 같이 주변이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로 머리 위에 핵을 가진 적국이 있는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차기 정부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반면 교사로 삼아 자체 핵 개발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바란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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