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의 삼남 랠프 안의 서거에 즈음하여
2022-03-07 (월)
차만재 / 프레즈노 가주 주립대학 정치학 명예교수
1957년 로스앤젤레스에 유학온 것이 제 인생에 결정적인 요소로 그 영향 중 제일 중요한 것은 1960년 흥사단에 입단한 것이다. 20세를 막 넘긴 약관에 이민 일세대 흥사단 단원 어르신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안도산 지사님의 가족과 절친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안창호 선생님, 사모님 안혜련 여사, 그리고 큰아들 유명한 할리웃 배우 필립, 맏딸 안수산이 나를 단소에서 만나 인사하다 이 분들 가족이 운영하던 중국식당에서 나보고 잡을 줄 테니 내일부터라도 일하라는 제의를 받았었다. 그래 그 주부터 캐셔 겸 손님 안내와 계산대를 지키는 일을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와 말년과 신년 파티가 낀 12월 식당일은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온 가족이 총 동원되어 쇄도하는 고객들을 맡는 일을 거들었다. 필립은 인기있는 배우다보니 자기 사진에 사인해달라는 손님이 줄을 섰고 나머지 가족들 차남 필선, 장녀 수잔, 차녀 수라, 막내 랠프가 돕고 사모님은 낮에 들러 식당 주변을 쭉 돌아보시고는 저를 신도유학생이라고 부르면서 말씀을 건네시곤 하셨다. 남가주 밴나이스 근처 파노라마 시티에 위치했던 문게이트(Moongate)란 이름의 이 식당은 요리사들을 홍콩에서 초청해 중국음식을 조리해내는 고급식당이었다.
안도산 가족들의 우애와 결속은 대단했다. 그야 그럴것이 인종차별이 심했던 바깥세상에 맞서 살아야 했던 상황에서 믿을건 가족뿐이었으며 특히 맏아들 필립은 부재중인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 형제자매들을 돌 보아야하니 자기 가정을 이루는 것은 희생해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었다. 필립이 저에게 가족을 저버린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하였다. 그러다 이승만 정부의 초청으로 고국방문 중 이승만 대통령이 자기 앉았던 의자를 가리키며 이 자리에 자네 부친이 앉아있어야 되는데 내가 앉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나에게 회고했다.
랠프도 군사정권 때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에 나가 아버님 묘소를 보고 주변사람들의 도산에 대한 경의와 사랑에 자기 아버지의 위치를 재삼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동안 나는 본토 한인이민자 정착지가 있는 다뉴바 리들리 근처 프레즈노에 취직이 되어 중가주 한인역사 연구발굴에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중가주 한인역사 연구회에서 1/3 축소의 서울 독립문을 리들리에 건립하게 되었다. 중가주와 관련된 10분의 애국지사 추모비가 독립문을 둘러싸고 있다. 생신년 순으로 이승만 안창호 윤병구 이재수 한시대 김호 김형순 김종림 송철 김용중 선생들의 비가 세워져있다.
2010년 독립문 헌정식 때 열분 모셔놓은 분들의 자손들을 다 초청하였다. 그날 10월 가을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그래 랠프와 통화 중 고령에 날씨도 좋지 않을 것 같으니 대타로 다른 사람 보내도 된다고 했더니 그때 그가 한말이 아니 내 아버님이 내가 참석하라고 하셨을거라고 하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겠노라고 하였다. 이것이 고인의 생활신조였다. 내 아버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했을까, 이것을 자기 생활의 지표로 삼고 95세의 생을 마감했다.
도산의 아들다웠다. 자기 부친이 그러하셨듯이 그 아들답게 한인 커뮤니티에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다 해냈다. 그립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인걸 어떻게 하겠는가? 왔으면 가는 법 고인의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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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만재 / 프레즈노 가주 주립대학 정치학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