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5일(토)은 칩장(蟄藏; hibernation)의 생물이 겨울잠에서 꿈틀거리는 경칩(驚蟄)이다.
경칩은 우수(雨水)와 춘분(春分) 사이에 있는 셋째 절기다. 겨울잠을 자던 벌레, 개구리 따위가 깨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산과 들이 기지개 펴며 드디어 봄의 약동이 펼쳐진다.
개구리뿐만 아니고 겨우내 잠들었거나 묻히고 숨어 지내온 칩장(蟄藏; hibernation)의 생물은 많다. 칩충(蟄蟲, 벌레), 칩수(蟄獸, 짐승), 칩린(蟄鱗, 물고기) , 칩연(蟄燕, 제비) 같은 길짐승 날짐승 곤충 외에 와신상담 때를 기다리며 칩거 중인 뛰어난 인물, 칩룡(蟄龍)도 있다.
이런 생명들이 겨울 지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이 때, 경칩이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인 지금, 나상국 시인은 ‘경칩날에’ 시에서 “… 요즘 같아선 개구리 아무리 개굴개굴 깨굴 깨굴 울어도 개구리 소리는 들리지 않고 미치도록 듣는 것은 코로나19 뿐이며, 그리고 얼음물 속에서 땅속에서 나온 개구리도 금 마스크를 써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봄눈은 이열치열식으로 봄볕에 쉽사리 녹아 내린다. 물이 되어 메말라 부르트고 갈라진 땅에 부드럽게 스며들어 싱싱하고 힘찬 기운을 퍼뜨린다. 봄을 재촉하는 봄비가 내리면 봄의 소생을 알리는 달래, 원추리, 미역취, 쑥, 산마늘, 참두릅, 당귀, 마늘겨자(Garlic Mustard)등은 긴 잠에서 깨어나 꼼지락거릴거다. 머지않아 개나리도 방긋 웃고, 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벚꽃잎도 휘날릴 것이다. 반갑지 않은손님 꽃가루도 사방팔방 춤출 것이다. 싱그러운 봄 내음 실어 오는 봄바람은 겨우내 얼어붙은 우리의 마음을 깨어나게 하고, 기분을 들뜨게 만든다.
그런데 경칩이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라는 우리의 전통이 있었음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금의 발렌타인데이(2월 14일)도 봄이 오는 길목에 있듯, 우리나라에도 봄의 길목에 ‘연인의 날’이 있었다. 벌레들이 겨울 잠에서 놀라 깨어난다는 바로 경칩 날이다. 신토불이 토종 발렌타인데이라 할 수 있다.
이날 우리 선조의 청춘 남녀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징표로 은행(銀杏) 씨앗을 선물로 주고 받기도 했고, 은밀히 은행을 나누어 깨먹었다고 한다. 병충해에 강하고, 추위에도 강한 은행나무는 30년 가까이 자라야 씨를 맺고, 손자 대에 이르러서야 열매를 얻을 수 있는 나무이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따로 있지만 서로 바라만 보고 있어도 열매를 맺기에 순결한 사랑이며, 또한 비록 맛이 쓰고 껍질이 단단하지만 땅에 심어 그 싹을 틔우면 천년을 살아가는 은행나무처럼 영원한 사랑을 염원 했을 것이다.
세조 때 편찬한 농서(農書)인 ‘사시찬요'에 경칩날의 풍습과 풍경이 기록되어 있다. “은행 껍데기에 세모난 것이 수 은행이요, 두모난 것이 암 은행이라 했는데, 대보름날 은행을 구해 두었다가 경칩날 지아비가 세모 은행을, 지어미가 두모 은행을 맞바라보고서 깨먹었다. 처녀 총각들은 이날 날이 어두워지면 동구 밖에 있는 암수나무를 각각 돌면서 사랑을 증명하고 또 정을 다지기도 했다.” 약 460년 전에 기록된 역사적인 팩트다.
왜 하필 은행이었을까? 은행나무는 암수가 가까이 있지 않아도 마주 볼 수만 있다면 결실을 맺어 ‘순수한 사랑’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는 천년을 살아가는 은행나무처럼 ‘영원한 사랑’을 기원한 것 같다. 요즘 시대에 천년이나 이어지는 지고지순한 은행나무 사랑을 꿈꾸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이미 백년가약을 했던 사람은 천년은 너무 길고 백년만 해로해도 좋을 것 같다. 백배사죄하는 일은 절대 않겠다고 서로 다짐도 해보자.
아직 백년가약을 하지않은 사람은 ‘연인의 날’인 경칩에 생명처럼 소중히 지키고 싶은 아름다운 사랑을 고백해보자. 천년은행나무, 천년바위같은 천년의 사랑을. 경칩에 까먹는 은행이 달콤하지만 입안에서 금방 녹아 사라지는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의 초콜릿보다 더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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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모 / 워싱턴산악인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