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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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단정한 삶

2022-03-03 (목) 이미경(발레 안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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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즈음이었을 때 내가 꿈꿔왔던 나의 중년의 삶은 멋진 차를 타고 다니며 이곳 저곳을 맘껏 여행하고, 일이 끝나면 사람들과 맥주 한잔을 하면서 세상을 안주삼아 토론을 하고 매순간 즐겁게 보내는 것. 철마다 맛집을 찾아다니고 즐겁고 뭔가 손에 긴장감을 줄 만한 일들을 찾아 해 보는 것이었다.

물론 이때 나의 계산에는 아이가 셋이라는 조건은 포함되지 않았었다. 그리고 삶에 지칠 수 있으며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살 수도 있다는 것 또한 고려되지 않았다. 막연히 어느 광고에서 본 그럴 듯한 삶, 혹은 영화 주인공들이 누릴 법한 삶을 막연히 동경하며 내가 나이가 들면 꼭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일부는 그리 이룬 것 같다. 내가 책을 사 보고 싶을 때 주머니를 여러번 뒤지면서 살 수 있는 책인지 아닌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고 맛집이 있다고 하면 일주일에 한 번쯤은 시간을 내어 갈 수도 있게 되었다. 친한 이가 나에게 무심코 던진 상처발린 농담에 웃으며 받아칠 여유도 생겼고 내 아이들에게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번 돈을 어떻게 세상에 나누어 주며 살 지를 고민하는 삶을 가르칠 여유도 생겼다. 그리고 건강과 신앙을 위해 어느덧 없으면 못 살 것 같던 맥주는 내 삶에서 사라졌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카프카의 책이 있던 책장에는 신앙서들로 가득 메워지게 되었다. 나의 20대를 공유한 나의 벗들은 지금의 나를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변한 것이다.


뚜렷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경건하게 산다는 것’에 대한 마음의 끌림이 있었던 것 같다. 늦잠 자던 내가 새벽 일찍 일어나 하루를 감사로 시작하게 된 것도, 자기 전에 오늘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준 것들을 회개하고 더 사랑하지 못하고 더 품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 반성하는 삶. 이러한 습관이 몸에 베면서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기쁨과 만족감, 충만감 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멀리 여행을 다녀오지 않아도 늘 마음에 쉼이 있고 꼭 멋진 차를 타지 않더라도 그 차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사람의 만남도 소중히 할 수 없으면 자제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말하기를 더디하기 시작했더니 실수가 줄어든다.

사람이 어찌 완전하랴? 이러다가도 내 옛 자아가 불쑥 튀어나오면 얼굴을 붉히기도 하지만 하루를 넘기기 전에 사과를 하고 풀어버리는 훈련을 하는 중이다. 이로써 삶의 기쁨이 세상에 있지 않고 내 영혼에 있음을 깨닫게 되니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나이듦의 아름다움은 이런 단정한 삶의 관록에서 오는 게 아닌가 감히 생각해 본다.

<이미경(발레 안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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