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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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그린 카드

2022-03-01 (화) 이은경(산타크루즈 코리안 아트 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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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세인트 패트릭스데이(St. Patrick’s Day)가 오면 미국 시민권 선서식날과 영주권 신청한 날이 떠오른다. 30여년 전 어느 날 새벽 3시에 산호세 다운타운으로 갔다. 아직 주위는 깜깜한 적막이 흐르고 찬 기운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이민국 건물 앞에 도착해 보니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길게 줄 서 있었다.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니 백인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줄 선 사람들 대부분이 남미, 멕시코, 아시아계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몇 일을 기다렸다고 했다. 남편은 길가에 슬리핑백을 깔고 아예 드러누웠다. 그렇게 날이 새고 이민국이 문을 열자 사람들이 줄 선 순서대로 이민국 건물 안으로 하나둘씩 불려 들어갔다.

거의 반나절이 지나서야 우리 차례가 와서 이민국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번호표를 뽑고 대기석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 앞 사람 차례가 지나고 정오쯤 되니 사무관들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또 1시간 정도를 더 기다렸다. 남편은 말이 없었지만 무척 불쾌해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끼도 못 먹고 화장실도 교대로 재빨리 다녀오며 오랜 시간 줄을 서서 기다린 우리는 지칠 만큼 지쳐 있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그는 이런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고 나도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일로 이런 경험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한 적이 없다. 다행히 아무런 문제 없이 영주권 신청 접수를 마치고 나오는데 이민국 직원 하나가 밖으로 나와 오늘은 여기까지 접수 끝이라고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들어가 버렸다. 하루종일 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실망과 원망스런 눈빛으로 이민국 직원을 바라보며 한마디도 못하고 떠났다.

“후유! 우린 그래도 다행이네. 저 사람들은 내일 또 와서 줄서야 되는 건가? 그런데 예약 번호도 안 주고 너무하다. 그치?” 내 말을 듣고 있던 남편은 “이민국 대기실 의견함 위에 카메라만 없었으면 욕을 한바탕 써서 넣고 오고 싶었는데 아내가 영주권 못 받게 될까 염려되어 꾸욱 참았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는 나의 반쪽, 나의 키다리 아저씨이고 이땅의 유일한 내편임이 분명했다 .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문득 ‘그린 카드’라는 영화를 보며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그날 영화 속 ‘그린 카드’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은경(산타크루즈 코리안 아트 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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