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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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끄트머리, 후미진 곳에

2022-02-16 (수) 신정은(SF 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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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북서단에 있는 랜즈 엔드(Lands’ End)는 사람이 손대지 않은 자연과 해협을 배경으로 한 땅끝 공원입니다. 대양 위의 암벽이 아름다운 해안 산책로에서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입구에 서 있는 구부러진 나무들입니다. 망망한 대해를 가르며 불어오는 거친 바람에 잎과 가지가 휘어진 나무는 바다와 육지의 두려운 경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지만, 그럴수록 풍파를 이겨내려는 내밀한 의지 또한 느끼게 합니다. 그렇게 두려운 흔적과 갈망이 나무도 사람도 있습니다.

그를 발견한 것은 장을 보고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고속도로 진입로 사이에 팻말을 든 남자가 차도와 인도의 경계에서 아슬하게 서 있었습니다. 혼잡한 차량과 갈 길을 재촉하는 분주한 사람들 속에, 우려와는 달리 그는 사뭇 담담한 표정으로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고, 팻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Homeless, not hopeless(노숙자라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온기도 울타리도 없는 바람 찬 길의 끝에서 한껏 움츠러든 사람은, 희망이라는 말로 자신의 존재를 밝히고 있었습니다. 빈 종이컵 위로 꼬옥 쥔 희망을, 그 무거운 손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노숙자라는 소외된 삶의 이름입니다. 모든 소외된 삶에 투시되는 치우친 시선을 걷어내면, 노숙은 신분이 아니라 상황이 됩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고, 한다리씩 건너 보면 친구일 수도 있는 이웃이고, 무엇보다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달에게 보는 것은 늘 똑같은 한 쪽일 뿐 전체를 볼 수 없듯이, 사람의 보여지는 삶도 그렇습니다. 끄트머리 후미진 곳은 삶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땅, 위기를 막아선 마지막 저지선에서 사람은 실존의 희망을 선택했습니다. 풍경의 저 끝에서 또다른 시작을 알리며, 그가 그에게로 가는 중입니다.

집으로 오는 내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한 사람을 생각하며, 그가 온 힘을 다해 들어올렸을 희망의 피켓을 헤아려 봅니다. 땅끝까지 다가간 고통만큼 간절했을 희망과 그것의 무게를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요. 비록 그는 보금자리를 잃었지만, 삶을 지탱하는 힘이 있습니다. 절망의 땅에서만 자라나는 희망의 씨앗입니다. 긴 기다림이어도 당신의 희망을 응원합니다. 시인의 말처럼, 험난함이 삶의 거름이 되어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인고의 무거운 여정이지만 당신을 위해 반드시 깃들어 있을 숨겨진 축복을 빕니다.

<신정은(SF 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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