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추위에도 거리는 인파로 붐볐고 차도도 복잡했다. 시내에서 서행 운전하다가 빨간 신호 앞에 정지했을 때였다. 횡단보도를 건너 인도로 올라서는 곳에 노숙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담요를 두르고 지하철 환풍기 위에 자리 잡고 있기는 해도, 이런 추위에 맞서기에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간간이 흩날리는 눈발도 그렇지만,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 데다가 바람이 매서워 보행자들도 종종걸음치게 되는 날씨였다.
이 추위에…, 저러고 있다는 걸 가족은 알고 있을까.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남편이며 누군가의 아들이련마는. 자식이 이런 날씨에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한데서 잠을 잔다는 걸 알면 부모 마음이 어떨까. 소식 끊어진 아들을, 남편을, 아버지를, 그의 가족은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싫어도 힘들어도 끊어버릴 수 없는 관계가 가족이다.
가족이라는 그 끈끈한 유대감 때문에 오히려 더 무겁고 힘들어서 일시적인 원망과 포기와 체념도 했었을 테고, 어떻게 해서라도 잡아볼 걸 하는 자책과 후회도 번갈아 넘나들었으리. 가치관의 차이는 피를 나눈 가족 사이에서도 극복할 수 없는 벽이 될 수 있다. 결국은 “밥이나 먹었을까...” 하며 한숨짓는 장면이 눈에 그려졌다. 서양 사람들도 비슷한지 모르겠지만, 우리네 정서로는 ‘밥은 먹는지’가 우선 떠오르는 마음 아닐까 싶어서다.
언젠가 고국을 방문했을 때 지하철 입구에서 실랑이하는 모녀를 보았던 기억이 밥이라는 단어를 타고 올라왔다.
“넣어두라니까.”
“창피하게 왜 그래요...”
“그러지 말고, 자아, 받어.”
“......”
“밥이나 잘 챙겨 먹거라.”
멀찌감치에서도 들릴 만큼 큰 소리였다. 저걸 기어이 뿌리치면 노모의 심정이 어떨까 싶어 마치 내 일인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나도 저런 적이 있었지. 못 이기는 척 받은 적도 있고 고집스럽게 거절하기도 했다. 내가 부모가 되고 나서야, 줄 때는 일단 받고 다른 방법으로 갚는 것이 지혜라는 걸 알았다.
하찮은 것 하나라도 주려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자식의 행보를 위한 부모의 조건 없는 응원의 몸짓이다. 그들 모녀의 속사정은 몰라도, 자신도 노상에서 좌판을 벌여 하루벌이 장사를 하면서 형편이 나으면 얼마나 낫다고 다 큰 딸에게 돈을 쥐여주며 끼니 걱정을 할까 싶었다. 아니다. 딸보다 훨씬 궁색한 처지에 있어도 챙겨주고 싶은 것, 그게 부모 마음이리라. 노인에게 그 딸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품어주어야 할 고슴도치일지 모른다.
장사하다 말고 일어서서 멀어져 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노인의 굽은 등이 펴질 줄 몰랐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딸이 떠난 자리에 감돌던 공허함을 지우려는 듯 바람이 한차례 불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좌판 앞에 앉아 먼지 풀썩이는 길거리에서 늙어왔을 노모의 굵은 주름 사이로 내려앉는 햇볕이 언제부턴가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친정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도 꼭 저 노인 같았다. 출가한 딸들이 굶고 사는 것도 아닌데, 만날 때마다 뭐라도 먹여 보내고 손에 들려 보내야 안색이 환해지며 흐뭇해했다. 부모 마음이 다 그렇다 해도 유별날 정도였다. 엄마에게는, 자식이 원하는 것보다는 엄마가 주고 싶은 것을 엄마가 주고 싶을 때 엄마 방식으로 주는 게 사랑이었고, 그걸 고분고분 받아야 효도였다. 요즘은 행복한 노후를 보내려면 딸이 있어야 한다는 세상이지만, 그 시절에는 아들을 낳아야 했는데 그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애꿎은 시대 탓을 해본다.
나도 아들 며느리가 집에 다녀가는 날엔 음식을 만들어 주거나 사 뒀던 물건을 줄 때가 가끔 있다. 잘 먹겠다고 고맙다며 덥석 받아 들면 음식 장만하면서 힘들었던 게 언제 그랬나 싶게 사라진다. 아이들에게 무엇인가 주고 돌아서면서 내가 더 행복할 때면, 그때 우리 어머니도 이런 심정이었겠지 싶다. 주는 행복이 받는 행복보다 깊은 맛이 있다더니.
기꺼이 받는 것도 효도다. 그러니까 너무 안 받는 것도 불효라는 말이다. 친구 사이에서도 주고 싶은 마음을 받지 않으면 서운할 수 있는데 부모 마음이야 말해 무엇할까. 그러던 부모도 자식이 장성하면 자식에게 의존하게 되는 시점이 있다. 늙고 병든 부모의 뿌리가 조금씩 흔들릴 무렵 자식의 삶이 뿌리를 내리게 되면 어느 순간 보호자의 역할이 바뀐다. 부모님께 보호자로서의 내 역할이 필요할 때 나는 고국을, 내 부모 곁을 떠났다. 길에서 만난 모녀의 실랑이에, 그래서 내가 그렇게 가슴 뻐근했었는지 모르겠다.
아흔 고개를 넘어 혼자 살다 보니 끼니 해결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라는 엄마와 통화할 때 나는 밥 인사로 말문을 열곤 한다. 타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화로 목소리 들으며 밥 인사나 나누는 게 고작이다. 이틀이 멀다고 전화하는데도 마치 몇 년 만인 것처럼 반가워하는 엄마 목소리에, 나는 그만 평온하던 마음을 놓치고 만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노모의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밥이나 잘 챙겨 드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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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