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패션 잡지 ‘보그(Vogue)’의 크리에이티브디렉터를 지낸 앙드레 레옹 탈리는 2020년 팟캐스트에서 보그 수장이자 ‘절친’인 애나 윈투어로부터 귀띔도 없이 해고됐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윈투어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했다. 그는 지난달 작고하기 전 “내 희망은 윈투어가 나타나 ‘당신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생전에 불화를 씻지 못했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보그를 정상에 올린 결정적 힘이었다.
사업가 아서 볼드윈 터누어는 1892년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보그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1909년 변호사 콩데 나스트가 인수한 후 사회 뉴스 외에 상류층를 타깃으로 한 패션 기사를 실으며 입소문을 탔다. 1916년 영국에서 최초 국제판이 출간돼 현재 세계 26개국에서 발행된다. 한때 독자가 1,250만 명에 이를 만큼 패션·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패션모델들은 4대 보그(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판)에 한 번이라도 등장하면 대성공으로 인정받는다. 물론 부침도 있었다. 라이프스타일에 치중하면서 1988년 신생 잡지 ‘엘르’에 밀렸다. 당시 구원투수로 등장한 편집장 윈투어는 ‘패션’ 중심으로 방향을 재정립했다. 평론가 캐럴라인 웨버는 2006년 12월 뉴욕타임스에 보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잡지’로 정의했고 윈투어는 ‘패션계의 황제’로 군림하게 됐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주인공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실제 인물이 윈투어다.
베이징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 내 소수민족 대표로 한복을 입은 여성이 등장해 ‘한복 공정’ 비판이 불거졌다. 이어 보그가 인스타그램에 우리나라의 한복(Hanbok·韓服)과 같은 옷을 입은 중국인 모델 사진을 게시한 뒤 ‘한푸(Hanfu·漢服)’로 소개해 문제가 되고 있다. 사이버 외교 사절단 반크는 보그에 시정을 요청하고 이를 비판하는 포스터를 제작해 소셜미디어에 배포하기로 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중국의 역사 왜곡에 항의조차 못하는 현 정부의 저자세 외교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주변국과의 역사·문화 갈등에 단호히 대처해야 보그와 같은 잘못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