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리스크’ 무속 논란
2022-02-10 (목)
미국의 39대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의 부인인 낸시 레이건은 역대 퍼스트레이디들 가운데 정치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남편인 레이건 대통령의 일정 등 일거수일투족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리고 그런 간섭과 개입 뒤에는 조앤 퀴글리라는 이름의 점성술사가 있었다.
레이건 부부는 할리웃 배우 시절부터 퀴글리를 알고 있었다. 퀴글리가 대통령 부부의 부름을 받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1년 3월 발생한 존 힝클리의 대통령 암살 기도였다. 암살은 미수에 그쳤지만 이로 인해 낸시 레이건은 편집증적인 상태가 된다. 남편이 언제 케네디처럼 총에 맞아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것이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난 남편을 보호하고 살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고 밝혔다, 그 일이란 백악관에 점성술사를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낸시는 정기적으로 퀴글리의 조언을 들었고 대통령이 만나는 사람들의 리스트를 그녀에게 건넸다. 퀴글리는 달력에 길일과 흉일을 체크해서 수석보좌관에 건넸다. 정해졌던 스케줄이 바뀌었으며 예정됐던 대통령의 여행이 “오늘은 하루 종일 백악관에 머물라”는 퀴글리의 점괘에 의해 취소되기도 했다. 퀴글리는 레이건이 임기를 마친 1988년까지 백악관의 비선 실세였다.
인간이 무속과 주술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그래서 비과학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점을 보고 무속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런 심리는 정치인들 사이에 특히 두드러진다. 선거철이 되면 역술인들의 집은 선거결과를 묻거나 조언을 구하는 정치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10여 년 전 뉴욕타임스가 보도했을 정도다.
20대 대선을 앞두고 터져 나온 윤석열 후보와 부인 김건희씨 관련 무속논란은 가볍게 넘겨버릴 사안이 아니다. 김건희씨는 공개된 한 통화녹음에서 “나는 영적인 사람인 도사들과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웬만한 무당은 내가 봐준다”고 말했다. 역술과 무속에 깊이 빠져있음을 짐작케 한다. 윤 후보는 당 토론회에서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고 나온 모습이 카메라 포착되면서 무속인 개입 논란이 일었다.
또 윤 후보 부부와 친분이 있는 무속인이 당 선거대책본부에서 주요 역할을 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국민의 힘은 이를 부인하면서 관련 조직을 해체해 버렸다. 의혹을 부인하면서 조직을 없애 버린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역술과 무속에 비판적인 기독교계의 반응과 입장은 엇갈린다. ‘한국교회연합’이라는 한 단체는 윤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무속 논란과 관련, “후보가 사과도 하고 우리가 주의를 줬으니 괜찮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자 개신교계 신학자 23명은 2월 초 ‘사이비 주술 정치 노름에 나라가 위태롭다’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우리의 정치판이 주술에 휘둘리고 있음은 통탄할 일”이라고 개탄했다. .
국민의 힘은 후보 부부의 무속 논란을 부인하면서 흔적을 지우는데 부심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논란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은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자리에 오를 수도 있는 인물과 그의 부인을 둘러싼 의혹이기 때문이다. 국정운영이 무속과 역술의 영향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개인 혹은 가족의 무속 사랑은 손쉽게 떨쳐버리거나 끊어낼 수 있는 성향이 아니다. 특히 오랜 시간 그래왔다면 더욱 그렇다. ‘무속 의존’은 사실 상 심리적 중독에 가까우며 그런 특질은 그 사람의 마음과 성격 속에 깊숙이 그대로 내재화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국민의 힘과 윤 후보가 관련 의혹을 애써 부인하거나 해명하고 있음에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무속 관련 의혹과 논란은 지나간 과거가 아닌 대한민국의 ‘미래 리스크’라고 봐야 한다.